묘지니 |
2009-01-26 12:25:00 |
조회: 187
하나님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 사랑의 패러독스(paradox)이다.
그것은, 너무 쉽게 만족하는 종교가들은 하나님 추구를 무시하지만, 불타는 마음을 가진 자녀들은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 베르나르(St. Bernard)는 4행시로 그 거룩한 패러독스를
말했는데 , 예배의 마음을 가진 영혼은 모두 즉각 그 진리를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을 맛보았습니다. 오! 당신, 살아 계신 음식이여,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당신으로 잔치하기를 갈망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들이켰습니다. 유일한 수원이시여, 그리고 우리 영혼은 당신으로 채워지려 갈증이 납니다.
당신과 나는 (우리의 죄를 제외하면) 크신 하나님의 작은 형상이다.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그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죄 가운데서 우리는 그 능력을 상실한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순간에 우리의 몸과 영과 마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가족 관계를
지각할 수 있고 그것을 알고 기뻐 날뛴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고,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제야 영광스러운 추구, 하나님의 무한한 부를 탐구하는 기쁜
마음의 추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시작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끝내야 할 곳을 발견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심오함에는 제한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이다.
끝없는 바다여, 누가 당신으로 소리내게 하겠습니까? 당신 자신의 영원성이 당신을 감싸고 있습니다.
하늘의 왕이시여!
과거의 성인들과 가까이 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내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열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애통했으며, 기도했고 씨름했으며, 밤낮으로 기회가 있든 없든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찾았을 때 그 발견은 오랜 찾음에 비해 훨씬 달콤한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을 더욱 알기 위해 논쟁할 때 사용했다. "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일어나
사랑스런 요구를 하였다. "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하나님께서는 이 열정의 표시를 솔직히 기쁘게
생각하셨고, 다음날 모세를 산으로 부르셨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을 모세 앞에 엄숙한 행진으로 지나가게 하셨다.
다윗의 생애는 영적 열망의 급류였고 그의 시는 찾는 자의 부르짖음과 찾은 자의 기쁨의 외침을 들려 준다,
바울은 자기 생의 주요 원천이 그리스도를 향해 타오르는 열망이라고 고백했다. " 그를 알려 하려" 라는 것이 그 마음의 목표
였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를 아직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찬송가는 하나님을 바라는 내용으로 차 있어 아름답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은, 그가 찾는 동안 이미 발견했다는 것을 안다.
바로 얼마 전 세대의 우리 조상들은 , " 나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보네, 나는 그를 따라가겠네" 라는 찬송을 불렀다.
하지만 이제 우리 대부분은 그런 찬송을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이 어두운 시대의 우리가 해야 할 추구를 교사들이 대신
해주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 받아들이는" 처음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받아들인다는
용어는 덧붙이자면,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계시를 더 한층 갈구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으면
더 이상 그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럴듯한 논리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러한 말이 정설의 결론인듯이
우리 앞에 정립되고 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주제로 예배드리고 갈구하고 찬송하는 교회의 모든 간증은 무시된다.
향기로운 생활을 한 많은 성도들의 경험적인 마음의 신학은 무시되고, 아우구스티누스나 리더퍼드(Rutherford)또는
브레이너드(Brainerd)같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 틀림없는 독선적인 성경 해석이 지지를 받는다.
이렇게 냉량한 분위기 속에서도 내가 즐겁게 인정하는 것은, 그런 얄팍한 논리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논쟁의 위력을 인정하겠지만,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며 한적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그 놀라움, 즉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마음으로 만져 보기를, 내면의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강한 열망을 의도적으로 권장하고 싶다. 그러한 열망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낮은 상태의
와 있는 것이다. 마치 딱딱한 나무 같은 신앙 생활은 우리에게 거룩한 갈망이 부족한 결과인 것이다. 만족하고 있는 것은
모든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것이다. 날카로운 갈망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나타남도 없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원하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을 그렇게도 오래 헛되이 기다
리신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세대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종교적 복잡성 속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성은 우리 가운데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시간과 관심은 요하면서도 마음의 갈망은 채워 주지 못하는 여러 종류의 신경을 자극하는 활동과 기구, 방법,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얕은 내적 경험, 텅 빈 예배, 또한 노예 근성으로 세상을 모방하여 발전시키고 있는 방법 모두가,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단지 불완전하게 알 뿐이고 하나님의 평안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모든 종교 형식 중에서라도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를 찾으려는 결단을 해야 하며, 그러고는 단순함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 어린아이들" 에게는 나타내시고, 지식이 있고 똑똑한 자들에게
는 깊은 어둠 속으로 감추신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의 접근을 단순화해야 한다. 필요없는 것을 제거하고 필수적인 것만을남겨 놓아야 한다.
(그럴 때 필수적인 것은 축복스럽게도 아주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모든 노력을 벗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간사함 없이 솔직하게 나와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의심할 것
없이 하나님은 속히 반응을 보이실 것이다. 종교가 그 결론을 말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을 찾자- 그렇지만- 효율적으로 찾자는 나쁜 습관이, 완전한 모습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 그렇지만" 이라는 그 속에 우리의 무서운 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 " 그렇지만" 을 빼어 버린다면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분 안에서 우리 생애 전체동안 비밀히 갈망해 온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이 단지 우리 생활을 좁게 만들고 끝없이 전개되는 마음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가질 필요가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고 집중할 수 있으며 그분 한 분을
위해 많은 것을 넉넉히 희생할 수 있다.
재미있고 오래된 영국 고전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owing) 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 사랑의 부드러운 감동이 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의 어떤 소유물이 아니라 그분 자신만을 의도하고
바라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을 미워하라.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당신의 지식과 뜻에 작용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영혼의 일이다."
다시금 그는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모든 것을, 더욱이 우리의 신학까지도 벗겨 없애버릴 것을 권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다른 아무 목적도 가식도 없이, 하나님을 향해 전념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 밑에는 신약의 진리라는 거대한 기반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그는 " 하나님 자신" 이라고 말할 때 " 당신을 만드신 하나님
, 당신을 사신 하나님, 당신의 분량대로 당신을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 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단순성을 좋아한다. 만약 우리가 " 종교를 신뢰해도 좋을 한 단어로 만들어야 한다면 한 음절로 된 것을
택하겠다. 왜냐하면 두 음절로 된 것보다 낫기 때문이고, 짧을수록 성령이 하시는 일과 잘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바로 하나님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땅을 분배하실 때 레위는 아무 땅도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따름이다. " 내가 너의 분깃이요 너의 유업이니라. " 이 말씀으로 레위는 다른 모든 형제들보다 부유해졌고 세상에 살았던
모든 왕들과 왕후들보다 부유하게 되었다. 여기 가장 높은 하나님의 모든 제사장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영적 원리가 있다.
하나님을 자기의 보물로 소유한 사람은 그 한 분 안에 모든 것을 갖는다. 그는 많은 평범한 보물을 갖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는 기쁨이 하나님과는 비할 바가 되지못해 행복에 필요 불가결한 것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가 보물들이
하나하나가 없어지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할지라도 ,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의 원천되시는 하나님 한분을 소유함으로써 , 그 분 안에 있는 모든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잃는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분,
그분안에서 모든 것을 순결하게 합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에 영양을 주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 하나님, 저는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저를 만족시켰고 저로 하여금 더욱 갈증하게 하였습니다.
제게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프도록 느끼고 있습니다. 저에게 갈망이 부족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 저는 당신을 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좀더 갈증나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기도하오니 당신을 진정 알도록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심 가운데서 내 안에 사랑의 새 일을 시작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에게 ' 나의 사랑,나의 연인이여 일어나 함께 가자' 라고 말씀하옵소서. 그리고
제가 오래도록 헤매던 이 습기찬 저지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르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에이든 토저의 [하나님을 추구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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