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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즉흥설교)

주님생각 |

2009-01-27 15:18:00 |

조회: 271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2006. 1. 21.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기도해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무엇을 구해야 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하셨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마땅히 빌 바”를 알아야 합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고 마땅히 빌 바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마땅히 빌 바는 두 가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줍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종교들마다 다 기도를 합니다. 세상 종교의 기도들은 자기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다 자기 필요를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그들이 섬기는 가짜 신이 부처일 경우, 부처의 나라나 부처의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무당 앞에 가는 것이나 부처 앞에 가는 것이나 사람들의 동기는 다 같습니다. 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전능하신 분이 아니고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갔을 때는 그냥 전능하다고 느껴지는 우상 앞에 나아간 것과는 마음가짐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갔을 때는 우리의 생각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전능하신 어떤 절대자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사랑이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기까지 사랑하셨다면, 그 아들이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기도할 때 그분 앞에서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 이행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정욕으로 드리는 기도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느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좀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이기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가서 이기적인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분이 충분히 우리를 생각하시는데, 그분이 충분히 우리를 돌보시는데, 그분이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분 앞에 가서 나의 이기적인 필요만 생각하고 구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다 더해주십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전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보호를 하나님 앞에 요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기도가 주기도문을 닮아야 합니다. 말은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나 우리가 기도하는 전체 내용이, 전체의 짜임새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기도문과 흡사하게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도의 순서들이 주기도문의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헛되지 않고 하늘에 열납 됩니다. 그래야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마땅히 빌 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께서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실까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씀에 보니 성경뿐만 아니고 성령이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시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방언기도입니다. 방언기도는 내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영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방언기도는 성령이 내 영을 통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방언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는 한국 말로 기도하지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금요기도회에 나와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기도해야 할 것은 많으나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마음에, 영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다. 내 속에서 끌어올린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그냥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가 새어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자기가 실컷 기도했는데 기도 끝나고 나면 무엇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기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생각으로 지나간 것을 기도한 것이고 그냥 말을 한 것이지 마음에서 끌어올려서 기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기도를 아시겠으며, 어떻게 그런 기도를 기억하고 들으시겠습니까?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면 절대로 한국 말로 기도하지 마세요. 그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아주 비효율적인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방언할 줄 모르는데요.”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잠잠히 있으세요. 그냥 주님 앞에서 침묵하고 고요히 있으세요. 그것이 훨씬 낫습니다. 무슨 수다쟁이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아십니까?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대사 읽는 것처럼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중언부언합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면 기도하지 마세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면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주님 앞에 침묵하고 머무세요.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있으세요. 그냥 주님 앞에 머물고 마음을 열고 있으세요. 그렇게 있다 보면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도할 것을 서서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 진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그래야 그 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마땅히 빌 바를 모를 때는 절대로 한국 말로 기도하지 말고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니까 기도가 간절해지지 않고 기도할 맛도 안 납니다. 기도가 행복하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고 기도하면 짜증이 납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는 바로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내 마음이 뭘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도 내 영은 압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해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비밀을 통변의 은사가 없으면 영은 알지만 마음이 모릅니다. 영은 인간의 마음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면 마음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생각으로 기도하고 말로 기도하고 한국 말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는데 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그런 경우에는 방언으로 기도했다가 한국 말로 기도했다가 그렇게도 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면 계속 방언으로만 기도하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무엇을 기도할지 알 때까지. 무엇을 기도할지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한국 말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야 기도들이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하나님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인간의 진정한 사정도, 인간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도, 내 머리와 내 마음이 모를 때가 많지만 내 영은 압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기도할지 알지 못하면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평소의 3분의 1만 기도해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기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응답을 받고 훨씬 더 많은 기름부음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령께서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주시는 방식 중의 하나는 예언적인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의 책을 보면 “쌍방향의 기도” 라고 나옵니다. 기도가 일방통행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듣고 말해야 합니다.

설교도 정말로 사람을 감화시키려면 예언적인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냥 내가 아는 성경, 내가 읽은 책, 내가 배운 것, 이런 것으로 조합이 된다면 그 설교는 사람의 혼에만 미치고 영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단순히 책과 지식이 아니고 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설교가 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영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분명히 성경적인 말씀인데 살아있지 않습니다.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어를 보면 레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계시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해서 혼을 찔러 쪼개고 그 다음에 영을 만집니다. 설교는 영을 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이지 마음의 양식이, 혼의 양식이 아닙니다. 말씀은 영을 만져야 하고 그 다음에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야 합니다. 이런 설교가 되려고 하면 그 설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9절에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라고 말한 것입니다. 설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 꼭 기도해 주실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말씀이 충만하게 임하도록, 깊은 말씀이 임하도록 끊임없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이 임할 때 설교가 효율적이 되는 것처럼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효과적인 기도가 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무 때나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비가 오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먼저 듣고 기도하는 것. 그런 기도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런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고 열납 됩니다. 그런 기도가 그대로 되고 응답 됩니다. 설교도, 기도도 먼저 들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를 끝내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 말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 기도 자체가 예언적일 때가 많습니다. 꼭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려온 기도가 많습니다. 그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고 마음에 불을 붙이고 기도를 타오르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그와 같이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께로부터 듣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셨는데 가장 대표적인 기도자들은 사도들이 아니고 선지자들입니다. 사도들은 중보기도보다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중보기도자들은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은 계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중보기도자들로 택했느냐? 그래야 효과적으로 중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중보기도자들은 하나같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중보한 아브라함도 성경에 보면 선지자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보한 모세도 선지자입니다. 사무엘도 선지자입니다. 또 중보하며 기도한 다니엘도 선지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중보자들은 다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어야 효과적으로 기도하고 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계시의 영이 임하면 그때부터는 중보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효과적으로 중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중보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적인 지식을 가지고 사탄과 짝이 되어 참소하는 말을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고, 예수님처럼 중보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정보를 가지고 중보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환상도 못 보고 예언도 못하고 입신도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기도가 효과적이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환상을 볼 수 없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오늘날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경은 잘 알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설교자들을 직통계시 이단이라고 매도합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더 주님의 음성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현대 교회의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면 강해설교를 잘하면 제자훈련을 잘하면 영혼들을 잘 인도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적 지도자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소경된 인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만 아는 것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환상을 못 본다고 예언을 못한다고 입신을 못한다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여러분이 진실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면 알수록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주님과 친밀할수록 주님의 음성을 더 잘 듣습니다. 이것은 환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 입신과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효과적이려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기도가 누수가 안 되고 헛되게 낭비가 안 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선지자가 기도하는 것처럼 강력한 기도, 효과적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얘기지만,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그 비결 중 하나가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은 내 영으로 듣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내 아버지의 성령이니라.” 여기서 “속”은 영입니다. 내 영 속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거기서 내 영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걸 내 영이 듣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고 내 영이 성령께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에게 얘기해도 잠자고 있으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영도 많은 경우에 잠자고 있습니다. 이 영을 깨워서 활동시켜야 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기도해도 영이 안 깰 때가 많습니다. 왜 기도가 안 되는가? 영이 안 깨어 있어서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으로 하는 것인데 영이 잠자고 있는데 영으로 기도하려고 하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깨우면 기도가 잘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영을 깨우고 작동시키는 기도가 방언기도입니다. 방언기도는 영을 움직이고 활동하게 만듭니다. 따라합시다.

 

“방언기도는 영으로 마땅히 빌 바를 따라 기도하게 할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마땅히 빌 바를 따라 기도하게 한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를 하면서 내 영이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를 함으로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를 함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방언으로 막 기도하다가 보면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깊이 부딪혀오는 기도 제목들이 생겨납니다. 그냥 생각이 아니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내 영에 꼭 들어맞는 기도 제목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마땅히 빌 바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정말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 머리에서, 혼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영에 공명이 이뤄지면서 깊은 기도가 정말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전에 생각으로 받은 것은, 그렇게 기도했던 것은 대부분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과 교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면 천국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면 만족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기도해도 마음에 허전해요. 그것은 5분도 교통이 안 돼서 그래요. 어떤 때는 한 시간 기도해도 중언부언하고 시간이 다 지나갑니다. 무슨 기도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옛날에는 기도하면 마음이 기뻤고 즐거웠는데 영에 채워지는 것이 있었는데 내 영에 새로워지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맹탕인 기도를 합니다. 그런 기도는 종교적인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는 중언부언이고 하늘에 상달이 안 되고 땅에 떨어집니다. 늘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늘 기도해도 이뤄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면 무조건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그렇게 계속 기도하다 보면 내 머리가 아니고 내 영에서 기도제목들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것이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내 영에 공명이 되면서 스스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집중해서 그리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향연입니다. 이것만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기도의 방법을 기억해두셨다가 꼭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가 효율이 높아집니다. 같은 시간을 기도했어도 훨씬 많은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고 훨씬 빨리 응답을 받습니다. 훨씬 많은 것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여는 열쇠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시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 그냥 주님 자신을 구하세요. 다른 것을 구하지 말고 무조건 “저는 예수님을 원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제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예수님과 친밀해지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무조건 이 기도만 하세요.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년 365일 언제나 우리가 마땅히 빌 바입니다.

저는 기도하다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면 이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응답은 지혜도, 능력도, 문제 해결도, 축복도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응답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응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천국입니다.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우리가 기도합니까? 천국을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대해서 눈을 감고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샨 볼츠가 말한 것처럼 정말 깊이 기도하면 영안이 안 열려서 자기는 모르지만 입신을 안 해도 그 사람의 영은 하늘나라에, 하늘 보좌에 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기도를 할 때 진짜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천국 가기 위한 것인 것처럼 기도하는 이유는 천국을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임재하면 그것이 천국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것이 느껴지면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가장 만족시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것입니다. 주님이 느껴지면 인간은 그냥 행복하게 되어 있고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주님이 곧 우리의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영광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빌 바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지혜를 받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너무 머리를 굴리다 보니까 타락했습니다. 강점이 약점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성경 말씀 앞에 겸손하지 않고 자기 지혜로 판단하고 행해서 넘어졌습니다. 그의 강점이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반대로 우리의 약점이 강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예로, 저는 무식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씀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전심으로 하나님의 지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강점이 약점이 될 수 있듯이 약점이 강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영계의 신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조건을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말은 얼굴만 보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혜, 재능, 능력, 재산, 인격까지도 보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격적이고 훌륭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닮고 그냥 인격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인격이 더럽기 때문에 회개하고 깨어져서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고 정말 천국에서 영화로운 삶을 삽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화낼 줄 모르고 정말 온유한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보고 온유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해라.’ ‘주님, 저 사람은 화낼 때가 없는 굉장히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타고난 인간의 의다. 그것 가지고 내 앞에 어떻게 서겠느냐? 저 사람은 품성적으로 사람들 앞에 온유함을 보이지만 그의 영이 온유하지 않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가 저 속에 없다. 그것은 혼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온유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라고 해라.’ 화 잘 내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너무너무 성품이 좋은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라 하셔서 그렇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인격이나 성품 가지고 목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인격이나 성품이 아니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죄인인 줄 알고 우리의 의가 하나님 앞에는 더러운 옷 같은 것임을 알고 주님 앞에 깨어지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심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성령의 열매라야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그것 가지고 교만해서 성령을 거절합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강점이 약점이 될 수 있고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할 것도 없고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도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주여, 보낼 자를 보내소서!”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야, 보낼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다 은혜지. 그냥 내가 너를 쓰겠다는 것이지. 네가 얼마나 변화되면 내가 쓰겠느냐?” 교만과 가짜 겸손 둘 다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이 겸손으로 보이고 겸손이 교만으로 보입니다. 진짜 겸손하면 주님을 의지해서 굉장히 엄청난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절대적으로 주님만 의존하기 때문에 엄청난 믿음의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교만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자주 믿음이 교만으로 보입니다.

믿음의 근본은 겸손입니다. “저희는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나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겸손한 자만 진짜로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의지하는 것이지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하거나 동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믿음은 겸손한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믿음은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런 확신이 그 속에서 올라옵니다. 그러면 굉장히 담대한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교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진짜 교만이 겸손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때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교만이었습니다. 그것이 겸손이었더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어야 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러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불러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미련한 자가 자기가 미련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달라붙으면 세상의 지혜자들을 능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세상의 강한 자들을 능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가짜 겸손 갖지 말고 진짜 겸손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 명예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동시에 세상 명예가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을 위해서 서야 할 명예로운 자리에 서야 합니다. 릭 조이너의 책을 보면 나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려 하지 않고, 가짜 겸손에 사로잡혀서 “아, 저는 못합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적격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시나무들이 옆에 있다가 요동하면서 “그러면 내가 하지! 너는 하기 싫다고 했잖아!” 이러니까 교계와 교단과 교회가 영적으로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적임자가 아닌 사람들이 나서서 감투를 쓰고 교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로 시켜주세요!” 하는 사람도 안 좋아하지만 “저는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절대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안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되면 되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뭐한다고 안 한다고 합니까?

영의 세계는 희한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재판을 잘 했지만 그는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와 같은 지혜가 없는 자라도, 그보다 훨씬 지혜가 없는 왕이라도 모세를 통해서 말씀했기 때문에 성경만 읽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이방 여인들을 취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나라를 찢어놓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시편 27편 4절에 “내가 구하였던 것 한 가지를 구하리니” 이것이 다윗의 일상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늘 그걸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그는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누가 진짜 지혜자입니까? 솔로몬입니까? 다윗입니까? 다윗이 훨씬 지혜자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지만 우리는 다윗처럼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했지만 그 지혜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지혜를 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했으나, 그 결과 정말 지혜를 얻었습니다. 누가 다윗보다 재판을, 정치를 잘 했습니까? 솔로몬보다 다윗이 배나 더 정치를 잘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할 때 진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고 진짜 능력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할 때 진짜로 유력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떻게 구합니까? 예수님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하는 것은 앵무새처럼 “주님만을 원합니다♪♪” 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주님을 원하는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집에서 설거지하고 방 청소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거기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습니다. 주님이 그리워서 왔습니다. 주님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그런 마음으로 ‘저는 주님이 좋습니다.’ 그러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구하는 기도가 무엇인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그런 열망이 타올라서 주님을 구할 수도 있지요. 그것은 마땅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님을 원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줘야 합니다.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주님께서 간단하게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이 너무나 상투적인 것이 되어 있다. 무엇이 진짜 나를 구하는 것인지 내 백성들에게 가르쳐줘라. 나를 구하는 것은 너희들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입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하다가 사람을 만나다가 너희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그냥 나하고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5분이든 10분이든. 꼭 한 시간을 기도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삶 속에서 정말 나만을 원해서, 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오솔길로도 들어갈 수 있고 벤치에 혼자 조용히 가서 앉을 수도 있고 나하고 있을 수 있는 곳에 가서 ‘나는 이 시간에 주님을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내게 오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구하는 것이다. 정해진 기도 시간 안에 맨 날 ‘주님만을 원합니다♪♪’(노래 가사) 이런다고 나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진실로 나를 원한다는 것을 삶에서 보여 달라.”

TV를 보다가도 끄고 ‘TV를 보는 것도 재밌지만 저는 주님과 있는 것이 더 재밌어요. 저는 TV도 좋지만 주님이 더 좋아요.’ 그러고 골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과 만나고 수다 떠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저는 주님과 얘기하는 것이 더 좋아요.’ 그러고 혼자 시간을 1분, 5분이라도 10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골방에 들어가서 주님 앞에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저는 주님이 좋습니다. 주님을 원합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진짜 기름부음이 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라는 것은 주님이 기름부음입니다. 기름이 성령을 뜻하는 것이잖아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잖아요. 주님 자신이 기름부음입니다. 기름부음이 진짜 언제 임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가 진짜로 주님을 원하는 것을 보여 줘 보세요. 그래서 ‘제가 주님을 원합니다.’ 그러고 5분 있으면 기름부음이 확 임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주님 앞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베짱이처럼 “주님만을 원합니다♪♪”란 노래만 부르지 말고 삶 속에서 TV 안 보고, 내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있지만 꼭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5분도, 10분도 좋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꼭 한 시간, 두 시간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새벽기도 때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정규적인 기도 시간에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시간을 전혀 초월하여 그냥 인격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세요. 그러면 1분도 파워가 있습니다. 5분을 해도 한 시간 기도한 것보다 파워가 있습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마치 바쁜데 시간을 내서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과 똑같다. 너는 부모가 무엇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부모가 꼭 많은 용돈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찾아올 때 꼭 큰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와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내가 네와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단순히 사람들이 많은 헌금을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열성적으로 전도하고. 단순히 내가 그런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들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일꾼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해서 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의 기쁨이요 내 마음의 즐거움이다. 그것이 내 가슴을 고동치게 하고 나를 흥분하게 한다. 내 자녀들이 종교적인 기도 시간에 종교적인 기도로 내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고 삶 속에서 나를 위하여 1분의 시간을 낼 때, 삶 속에서 나하고만 있기 위해서 한적한 공간에 가서 나를 위해서 5분의 시간을 낼 때 그것이 나를 얼마나 흥분시키는지 아느냐? 그것이 내 마음에 얼마나 기쁨과 만족을 주는지 아느냐? 너희는 너희가 하찮기 때문에 너희가 내게 그런 기쁨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의 그런 작은 행동들이 나를 흥분시킬 수 있고 나를 기쁨으로 뛰놀게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그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구를 주님께 드린다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 지구를 드려서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을 잠시 시간을 내서 정말 우리의 가슴으로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이 절 사랑하신 그 사랑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님 때문에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주님 때문에 저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주님, 제가 다른 무엇보다도 정말로 주님을 원합니다. 제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주님은 비이기적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주님은 우리를 이용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단순히 우리를 부려먹을 생각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과 사랑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사랑은 마치 마약과 같습니다. 모든 고통도 모든 어려움도 모든 가난도 어떤 난관도 기쁨으로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게 만듭니다. 양치는 일이 너무나 힘들고 험악한 일이었지만 라헬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던 야곱처럼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헌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어디 그 계명뿐이겠습니까? 그의 계명에는 인간이 행해야 될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경건하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섬기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고난당하는 것도 순교도 힘들지 않습니다. 썬다 싱은 “십자가는 천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경험을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고문당하는 것은, 순교당하는 것은 천국이다.” 그는 매를 맞고 거머리에게 물어뜯기고 묶여 있고, 굶고 춥고 고문을 당하면서 천국을 느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고문도 순교도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순교까지도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거기가 감옥이나 형장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구하지 않으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시편 기자가 말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사모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주님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구하지 않고 무엇을 구한다 말입니까? 우리가 그분을 구하지 않고 그분보다 무엇을 탐할 것이 있고, 무엇을 사모할 것이 있고, 무엇을 구할 것이 있습니까? 마땅히 빌 바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너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했는데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빌 바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또 찾으며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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