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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변승우 목사님의 즉흥설교)

주님생각 |

2009-05-04 22:37:00 |

조회: 357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2009. 3. 17.

 

 

  행 3:11, 1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니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고 병을 실제로 고치신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침 받은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뿐 아니라 사역자 자신도 그래야 합니다. 사역자 자신이 자기를 주목하면 안 됩니다. 자기의 경건이나 능력이나 권능이나 은사에 주목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 주목하면 그것이 믿음 같은데 헛바람이 들어가 가지고 가짜 믿음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주목하면, 자기의 경건이나 능력이나 은사를 주목하면, 그것 때문에 기도하면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하면 낫지 않습니다. “믿었는데 왜 그렇지?” 그것은 믿은 것이 아니고 착각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혼동할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은 이것밖에 안 되는데 사람이 교만해지면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혼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형태로 자기 심령에는 와 닿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경건이나 권능이나 뭐든지 그렇습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이라든지 은사라든지 이런데 주목하면 헛바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하고 똑같이 느껴집니다. 믿음하고 똑같이 느껴져서 “기도하면 낫겠다.” 그런데 기도해도 별로 안 나으니까 이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서 충분하고 가능하다고 하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는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것으로서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한계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경건, 자기 권능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 믿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것이고 교만 때문에 들어간 헛바람입니다. 가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를 바라볼 때 나오는 느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16절에 그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건이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기도나 내가 받은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주목하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나는 것입니다. 치유를 위해서 기도할 때 “내가 기도하면 나을까?” 그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이다. 나는 내 은사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고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니, 이걸 어떻게 고치지?” 이 부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고보서 5장 15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사실은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니까 주님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믿음이 강하다.” 이렇게 자기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내가 고친다고 하면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암환자를 고치시는 것이 뭐 어렵습니까? 나는 그분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내가 기도해서 이 사람을 고쳐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하고, 병 고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이 믿음과 사역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신유 사역도 축사 사역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믿는 것이 신유 사역의 비결입니다. 내 기도나 내 권능이나 내 은사나 내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믿지 마세요. 믿음을 믿으면 낭패를 당합니다. 믿음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믿음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세요. 믿음은 우리 속에서 의심을 다 뽑아내고 믿음만 모으는 이런 심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의지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더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지 믿음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하다, 약하다 그런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자꾸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나는 못하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해서 머리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영으로 정말 거기에 제대로 올인해서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도 이게 머리로는 되는데 영으로는 안 될 때가 많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영으로, “내 믿음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못하는데 예수님은 하실 수 있고 그래서 나는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분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그러면 주님께서 일으키실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을 내 영으로 분명히 붙잡고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모든 병이 다 낫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키가 자라라!”고 하면 키도 자랍니다. 각색 병들이 치유가 됩니다. 제가 그것을 해봐서 압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해야 기적이 일어나도 베드로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고 바라볼 때 자기가 영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바라보느냐? 나는 내 경건을 바라보고 믿음이 생겨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물론 성령의 권능은 받았지만 그 권능을 바라보고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명령했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이다. 내가 실제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이다. 그 이름이 낫게 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낫게 했다. 바꿔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셨다. 그런데 우리와 무슨 상관이라고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믿음에 초점을 맞추니까 자꾸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 은사에, 자기가 기도한 것에, 자기의 기름부음에 초점을 맞추니까 자꾸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것은 치유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이러합니다. 모든 것에서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거룩에, 사랑에, 성자 같은 삶은 사는데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고아나 장애인이나 노숙자를 돌보는 사람들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고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했더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뿐만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사랑이 나를 이렇게 하게 됐다.” 이래서 고아들과 노숙자들을 돌보는 간증을 해도 초점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야 되는데 초점이 그 사람에게 가 있는 목사들이 한국에도 외국에도 많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왜 기적을 행하고 영광 받는 것만 위험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이 주목 받는 것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지요? 거룩한 삶을 살고 주목 받는 것도 위험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주목 받는 것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병 고쳤다 해서 영광 받는 것보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영광 받는 것이 배나 더 위험합니다. 기적을 행하고 주목 받고 영광 받는 것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주목 받고 영광 받는 것이 일곱 배는 더 위험합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응용해 보세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믿음만 예수님께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도, 설교도, 거룩도, 사랑도, 기도도, 찬양도, 교회 부흥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목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쏙 빠져야 합니다. “왜 나를,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바꿔 말해서 이것은 은혜이다.” 이것이 확실히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부터 말미암아 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참 조심해야 합니다. 병고치고 교만해지고 거룩한 삶을 살고 교만해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기도 많이 하고, 찬양을 멋들어지게 하고 교만해지고, 이래서 교만해지고 저래서 교만해지고 그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여기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응용해서 희한한 것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왜 치유에 있어서 굉장히 깊이 들어간 사람이 가끔 가다가 생뚱맞은 소리를 하느냐?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것을 분별 못할 사람이 아닌데. 왜 계시에, 말씀에 있어서 깊이 들어간 사람이 가끔 가다가 생뚱맞은 계시를 받고 엉뚱한 얘기를 하는지 아세요? 사람이 사랑하고 겸손하면 정확해져야 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거룩한 사람이 왜 가끔 가다가 이상한 계시를 받고 잘못된 계시를 받고 생뚱맞은 소리를 해서 물의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지 아세요? 이것이 영적인 현실을, 내막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왜 사람이 어느 정도 기도면 기도, 거룩이면 거룩, 사랑이면 사랑, 말씀이면 말씀, 신유면 신유, 계시나 입신이면 입신, 이론적으로 적어도 초보가 아니고 세계적으로 베스트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가끔 가다가 생뚱맞은 응답을 받고 허튼 소리를 하는지 아세요? 그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계시의 사람이고 나는 능력의 사람이고 나는 거룩한 사람이고 나는 사랑의 사람이고 희생적인 사람이고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이런 잘못된 자의식에서 나온 교만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지혜 있고 슬기 있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것 때문에 교만해진 것을 말합니다. 교만은 숨겨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났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단순히 치유 능력이 강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말씀이 좋은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언이나 계시들이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니고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거룩한 삶을 살고 단순히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이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자기 같은 사람을 써주시고 자기 같은 사람도 변화시켜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감지덕지하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더 주님을 의지하고 더 주님께 달라붙고 더 낮아지고 더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더 기도하고 이래야 진짜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단순히 말씀에서, 어떤 깊은 은사에서, 그 사람이 거룩하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수의 분별력들이 거기서 나오지만 결정적인 분별력은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하는 예언들은 다 맞았는데,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거룩한데, 저 사람은 저렇게 사랑이 많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데, 성자 같은데 어떻게 저 사람이 이런 틀린 응답을 받을까? 어떻게 저 사람이 이런 것에 대해서 오류가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이 이것을 분별 못하지?” 그게 그 사람의 그런 장점들이 가져오는 교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속입니다. 그것이 가져온 교만이 눈을 흐리고 귀를 흐려서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은 위험하고 말씀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아닙니다. “신유 은사가 경험이 없고 어설픈 사람은 위험하고 경험이 많고 국제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아닙니다. “계시가 처음 열려서 어설플 때는 위험하지만 이제 계시를 많이 받고 분별력도, 경험도 많이 쌓이고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위험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말씀한 것처럼 여전히 위험합니다. 교만하면 위험합니다. 절대로 말씀이 안전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깊은 기름부음이나 거룩이나 사랑이 그 사람의 안전을 확보해주지 못합니다. 겸손만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겸손만이 우리의 안전을 확보해줍니다.

 

  한편, 교만은 딴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3장에 “의인이 의를 행하다가 돌이켜서 악을 행하면 그 전에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고 악인이 악을 행하다가 돌이켜서 선을 행하면 그 전에 악이 그를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인이 왜 의를 행하다가 악을 행하게 되는가? 왜 넘어지게 되는가? 왜 타락하고 실족하게 되는가? 그 원인은 자기를 스스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바라보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밖에, 의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왜 복음을 전합니까? 로마서 1장에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믿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안 믿고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믿음이 행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격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 믿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노력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애써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은혜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뭐냐?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믿고 교만해져서 악을 행하게 됐다.” 이것은 예수님을 바라봤던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인데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죄를 극복하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근원이시기 때문에 계속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나중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자기를 바라보면서 ‘와~ 내가 굉장히 거룩하네! 내가 거룩한 사람이네. 이렇게 죄를 이길 수가 있네. 내가 사랑이 굉장히 많구나. 내가 굉장히 겸손하구나. 내가 대단한 계시의 사람이구나. 내가 대단한 능력과 기도의 사람이구나.’ 예수님을 바라보는데서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 근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데서, 은혜로 말미암아 형성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타락이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바다에서 물 위를 걷다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걸을 때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나는 것입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사랑, 계시, 능력, 거룩 뿐만 아니라 물 위를 걷는 것도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걷다가 딴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풍랑을 바라보니까 빠졌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풍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풍랑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는 것으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그분이 오라 하셨으니까 그분이 책임지시겠지, 그분이 역사하시겠지” 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그런데 풍랑을 바라보면 “나는 바다 위를 못 걷는데.” 벌써 생각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가버렸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어? 사람이 어떻게 무서운 파도치는 바다 위를 걸어갈 수 있어?” 이것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타락은 다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갑자기 음란해져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탐심이 들어가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남이 미워지고 살기가 등등해서, 갑자기 게을러져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교만해져서 타락한 것입니다. 사탄은 원래 보좌에서 예배자였습니다. 찬양 리더였습니다. 예배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스랍 천사들처럼 “거룩하다, 거룩하다.” 천사들은 자기가 없습니다. 많은 천사들이 “나는 스랍 천사다. 나는 거룩하다. 나도 죄 한 번도 안 지었다.”가 아니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것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고 초점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생각해봐도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또 생각해봐도 거룩하시고 다시 생각해봐도 엄청 거룩하시고… 계속해서 스랍 천사의 생각은 하나님께, 하나님께 계속해서 더 깊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것이 찬양이고 경배입니다. 마귀가 원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마귀는 자기를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는 존재였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묵상하는 존재였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을 바라보는 존재였고 그것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마귀 속에 탐심이나 음란이나 미움이나 게으름이 들어간 것이 아니고 마귀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멈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마귀가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이제는 나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미끄럼틀입니다. 모든 타락은 교만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든 회개는, 모든 믿음은 겸손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든 거룩은, 모든 사랑은 겸손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든 말씀에 관한 이해, 모든 신령한 계시와 예언, 모든 기적과 능력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겸손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것은 다 겸손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타락은, 모든 미혹, 속임수, 잘못된 계시, 잘못된 판단, 오해, 편견은 다 교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에 이단시비가 많은 것은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고 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이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꾸 성경 지식, 신학적인 지식, 강해설교하고 제자훈련하면서 자꾸 지식적인 설교하니까 목회자들이 전반적으로 너무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해져서 분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걸핏하면 이단이라고 하고… 교만이 모든 미혹을, 속임수를 갖고 오는 것입니다.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안전하려고 하면 엎드리면 됩니다. 서 있으니까 넘어지지 아예 팍 엎드리면 누가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 발 앞에 엎드리면 안전합니다. 겸손해지면 됩니다. 안전한 곳은 굉장히 높은 계시의 차원으로, 능력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높은 어떤 거룩의 단계나 사랑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있는 자리에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납작하게 엎드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우리 속에서는 절대로 믿음이 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집중할 때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깊이 알 때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차원적인 정의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못 믿잖아요. 알수록 믿을 수 있잖아요. 어린아이가 지나가는 아저씨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옆 집 사람이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고, 학교 선생님이면 더 믿을 수 있고, 이모나 삼촌이면 더 믿을 수 있고 엄마, 아빠면 100% 믿을 수 있지요. 그 믿음이 아는데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예수님께 초점 맞추고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평소에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있습니다. “저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 왜 응답이 정확하지 않은가? 성경을 저렇게 많이 아는데 왜 속는가? 치유의 기적이 저렇게 엄청난데 왜 저런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가? 저렇게 거룩하고 저렇게 사랑이 충만하고 저렇게 희생적인 삶을 사는데 왜 분별하지 못하는가? 왜 어떤 부분에서는 속는가? 또 왜 생뚱맞은 응답을 받는가? 그래서 교계에서 물의를 일으키는가? 또 많은 영혼들을 흔드는 저 정도 은사 있는 사람이 저렇게 나중에 허튼 응답을 받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해봤자 뭐하겠는가? 저 정도의 사도가, 저 정도의 선지자가, 저 정도의 하나님의 사람이 저 경지에 이르렀어도 저렇게 엉터리 응답을 받고 엉터리 얘기를 하는가? 그러면 우리가 발바닥이 땀날 정도로 달려도 저 사람 수준을 못 따라가는데 우리가 나중에 뭐가 되겠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 국제적으로 크게 쓰는 사람들 중에 착각하는 것도 많고 미혹되는 것도 많고 또 응답에 있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은 교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교만이 아니고 일반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교만이 아니고 그런 차원에서는 그분들이 다 겸손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한 그런 차원에서 교만한 것입니다. 그런 차원의 교만이 그런 차원의 미혹을 가져 온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입니다.

 

  제가 예전에 설교한 내용 중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겸손이다. 기독교는 겸손에서 시작해서 겸손으로 진행되고 겸손으로 끝난다.”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마 18:3)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들어도,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계시가 되도록, 그래서 하나님께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자기 죄를 깨닫고 복음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될 수 있는 겸손을 말합니다. 여러 해 전에 성령께서 제게 가르쳐주셨는데 정확하게 그 말씀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씀을 계시로 받아들여서 그 말씀이 자기 심령을 동하게 만들어서 회개하게 만들고 믿게 만들고 거듭나게 만드는,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씀은 정확하게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계시잖아요. 지식이 아닙니다. 계시만이 영에 들어가고 영을 뒤흔들어서 진짜 회개하게 만들고 진짜 믿게 만들고 진짜 거듭나게 만들고,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한 것처럼 그런 계시적인 살아 역사하는 말씀만이 사람을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듭니다. 이처럼 신앙의 출발이 겸손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과정은 무엇입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그런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느니라.”(약 4:6)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무엇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까? 겉보기에는 말씀으로, 기도로, 봉사하고 사역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믿음은 겸손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면, 믿음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믿음이 자라는 것은 더 겸손해져서 더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 더 겸손해져서 더 주님께 붙어있는 것,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많은 열매를 얻으리라.”(요 15:5) 말씀하신 것처럼 더 겸손해져서, 더 낮아져서 더 주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더 큰 은혜가 내게 오고 그 은혜로 내가 만들어지고 내가 이제는 거룩해졌으니까 변화가 되었으니까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라, 이게 정말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을 알고 더 주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알고, 내 영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든지 더 주님이 필요하고 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알고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고 더 의지하고 더 기도하고, 그래서 더 큰 은혜를 받고 그리고 또 더 낮아지고 그래서 더 큰 은혜를 받고 이러면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10층 빌딩을 지으려고 하면 10층 빌딩에 맞게 파고 내려가야 되고, 100층 빌딩을 지으려면 100층 빌딩에 맞게 파고 내려가야 되는데, 무슨 신앙이 파고 내려가는 것은 없이 말씀만 자꾸 쌓아 올리고 은사만, 봉사만, 무슨 직분만 자꾸 쌓아 올리니까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명한 목사들이 무너져 내려버리고 믿었던 성도들이, 은사자들이 무너져 내려버립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말씀에다 말씀을 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에다가 은사를, 기도에다가 기도를, 봉사에다가 봉사를, 직분에다가 직분을, 사역에다가 사역을 계속 더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계속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더 어린아이같이, 갓난아이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그 영은 더 갓난아이가 되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보는 것”(시 123:2)처럼,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 영혼은 갓난아이같이 점점 순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는 것이 계속되어서 완전히 그 영이 갓난아이같이 순전한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전폭적으로 전적으로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신앙의 출발부터 겸손으로 출발 되는 것이고 신앙은 이렇게 겸손해짐으로써, 단순히 말씀이 증가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자꾸 증가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주님의 은혜가 자꾸 증가되어서 자라는 것이 신앙 성숙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최고의 하나님의 사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던 세례 요한이 “나는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 1:27)고 말했고 가장 위대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도 점점 낮아지고 점점 자기가 작아지고 점점 겸손해지는 것처럼, 단순히 점점 말씀이 충만하고 점점 계시가 정확해지고 점점 기적을 행하고 사역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지고 겸손해져서 위대한 사도로써 일생을 마치고 보좌 앞에 섰을 때 위대한 선지자로써 세계를 진동시키고 수많은 열매를 맺고 보좌 앞에 섰을 때, 사도로 선지자로 서는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교회의 목사로 서는 것이 아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사로 서는 것이 아니고 무익한 종으로 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한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주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것도 할 지혜도 할 능력도 없는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고 무능한 자를 강하게 하셔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같은 것이 이렇게 쓰임 받은 것이 특권입니다. 이것이 저의 자랑이나 공로가 아니고 이것이 제가 주님을 섬겼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 같은 자가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주님, 이것은 특권이었습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같이 아무것도 아닌 자를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열심을 주셔서 사용하셔서 이런 열매를 맺게 된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전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주여, 저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다 행했습니다. 다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놀랍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보좌 앞에 나아가서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은 제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합당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최고의 예배가 그것입니다. 거문고 타고 경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최고의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로 쓰임 받은 자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놀라운 열매를 맺고 가장 거룩한 삶을 살고 가장 사랑이 충만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도했던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기적과 계시와 말씀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자기가 무익한 종인 것을 알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모든 것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자기의 영으로 100% 절감하고 느끼면서 주님 앞에 가서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서 일생 수고하고 헌신해서 받은 면류관을 내려놓으면서 “주님, 주님만이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만이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겸손으로 시작해서 겸손으로 진행이 되어서 겸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은 다 겸손한 자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 겸손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오만한 이단사냥꾼들은 귀가 막혀서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허튼 소리할지 모르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 겸손하지 않으면 목사든, 신자든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일정 수준 이상 겸손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겸손하지 않는 자들은 넘어지고 타락하게 되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생명과 같이 귀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마 23:12)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입니다. 누구를 승진시킬 것인가, 누구를 해고시킬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입니다. 교만한 자는 낮추시고 교만한 자는 최악의 경우에는 사울처럼 해고시키고 겸손한 자는 다윗처럼 높이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각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인류를, 사람을 보실 때 주님이 그 사람에게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말씀인가,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치유의 능력인가? 은사인가, 거룩인가? 심지어는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인가? 희생인가?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주님께서 결국 보시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교만과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을 살피실 때 결국, 최종적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정하시기 전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교만하냐, 겸손하냐? 그래서 제가 너무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지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전심으로 자기를 향한다는 것이 겸손하게 철두철미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눈은 그것을 보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눈에 발견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주님의 눈에 띄었던 것처럼 주님의 눈에 발견되시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가 끌리는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싫고 어떤 유형의 사람은 좋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끌리십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참 진리가 있는데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거머리처럼 “다고 다고”하고 기도 많이 한다고 깊은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양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의 양이나 계시나 메시지나 체험의 양적 증가입니다. 양적 증가가 아니라 질적으로 깊이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기도 많이 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안수 많이 받는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겸손에 비례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해질수록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욕심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머리처럼 “다고 다고”하고 보채고 기도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시면 진짜로 아름답게 인생을 끝마치게 되기를 원하시면 세계적인 대형교회 세우고 추하게 늙고, 세계적인 사역하고 추하게 늙고 그렇게 되지 말고 신유사역자들 중에 80~90%가 종말이 좋지 않잖아요. 그들 중 80~90%가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여러분의 종말이 아름답기를 원하시면 끊임없이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세례 요한처럼, 바울처럼 끝마침이, 종말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감사드리고 찬송드리고 찬양드리며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의 본질은 겸손이라는 것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겸손이 없이는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이는 진짜 신앙의 성장이, 신앙의 성숙이 없습니다. 겸손이 없이는 아름답게 퇴진할 수 없습니다. 아름답게 사역을 마무리 지을 수 없습니다.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만 이런 은혜가 주어집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아도 아무리 예언의 은사가, 신유의 은사가 강력하게 임해도 아무리 제 집처럼 천국에 왔다 갔다 해도 겸손해지지 않으면 결국에는 미혹이 옵니다. 미혹이, 속임수가 섞입니다. 자비로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겸손하게 해 주시옵소서. 초점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무익한 종 이상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지혜가 있든 어떤 능력이 있든 아무리 사역이 커지든 우리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변화되든 우리는 그저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무익한 종을 하나님이 써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손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목사들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 목사들의 진절머리 나는 지독한 교만을 회개합니다. 교수들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한국 강단과 교회와 신자들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교만을 뿌리 뽑아 주시옵소서. 교만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 배후에 있는 교만의 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어버리노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박을 받을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날지어다! 목사들에게서 떠날지어다! 교수들에게서 떠날지어다! 유명한 자들에게서 떠날지어다!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네가 가지고 온 미혹과 함께 떠날지어다! 네가 가지고 온 참소와 함께 떠날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날지어다! 제거될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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