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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참, 아직도 큰믿음교회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음해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겸손 |

2008-02-14 00:00:00 |

조회: 104

 “허~참, 아직도 큰믿음교회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음해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저는 단 한 번도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고 무지와 편견을 가지고 들어서 잘못 듣고 그렇게 오해했을 뿐입니다. 그 명백한 증거로 제 책에서 제가 믿음과 행함과 그리고 구원과의 관계를 설명한 몇 부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공정한 마음으로 읽어보시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므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자가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먼저, 저의 책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무명의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쓰고 그 책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책은 구원론을 재조명하고 성경대로 돌려놓으려는 저의 작은 노력입니다.

  현재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진리에 눈을 뜨고 그리고 회개하고 변화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동안 잘못 가르침 받은 것이 쌓인 결과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대구 신은교회 수련회 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양약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첫째,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100%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은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구원의 공로는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다고 전 인류가 천국에 갑니까? 아닙니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공로적인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지만 그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원의 수단은 회개와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도 그 공로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막 1:15).

 

  셋째, 이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회개와 믿음이 참된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공로를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위조지폐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가짜 회개와 믿음 역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회개이고 믿음입니까?

  가짜 회개는 죄를 자백만 하는 것이요, 진정한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겔 18:30-32). 가짜 믿음은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요, 진짜 믿음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약 2:14). 그러므로 저는 이런 회개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 때마다 강조하고 주장합니다.   

  저는 일부 사람들이 저의 가르침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처럼 믿음에다가 행함을 더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여러분이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저의 가르침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지극히 성경적인 메시지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다음으로, 존경하는 나겸일 목사님께서 추천해주신 저의 책 “주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폐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또한 성경은 율법이 폐해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마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런 말이 가능한 이유는 율법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의식법, 민법, 도덕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의식법은 제사나 절기, 음식에 관한 규례들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께 대한 모형이며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폐해졌습니다. 민법은 각 나라의 법을 통해 계승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에 드러나 있는 도덕법은 영원히 폐해지지 않습니다(마 5:17-48).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이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롬 3:20). 그런 의미에서라면 도덕법 역시 폐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롬 10:4).

  이것은 진리지만 그러나 진리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여기까지만 압니다. 즉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소경된 인도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분명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무 율법으로 밀어 넣지 않으며 십계명에 묘사된 도덕법을 지키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율법주의 못지않게 무율법주의 역시 이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이 쓴 것입니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라고 묻습니다. 왜 이렇게 질문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는 부정되었고 율법이 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데 어떻게 율법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굳게 세울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믿음은 곧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곳에서 또 다시 바울은 우리가 육신 즉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영 즉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좇아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면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때 “율법의 요구” 즉 의와 거룩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 받은 자는 율법(도덕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율법을 단순히 행위로 지킬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킵니다.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참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즈는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그들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찰해야할 가장 중대한 점들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성결관과 성화관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관은 어떠합니까? 우리 주님은 여기서 기독교인의 의, 곧 가장 작은 기독교인의 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주님의 분석에 비추어서 검토해야 하겠습니다.”1)


  우리는 바리새인들에 관해서 아주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바리새인들은 행동으로나마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것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 나오는 그들의 고백에도 나타나고, 대접의 겉만 깨끗하게 한다는 예수님의 지적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행동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일예로,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 것입니다.

 

  마 5:27-30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것은 성경적인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하며,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교하면 대번에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라고 공격합니다. 실제로 저는 신문 지상을 통해서까지 이런 공격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그런 억측으로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두 가지로 공격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간다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을 주장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왜 ‘행위’하면 율법의 행위만 생각을 하지요?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행함입니다. 즉 복음적인 순종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이며, 이것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참된 믿음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저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로 저를 공격하는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했다(롬 3:20). 누가 과연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겠는가? 변 목사가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결국 율법(도덕법)을 지키는 것인데 과연 율법을 다 지키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천국에 갈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이것 역시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따르는 행함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데서 나오는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율법의 모든 계명을 항상 완벽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참 신자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게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참 신자가 가지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다름 아닌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믿음에 따르는 행함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성화가 아니며, 믿음 역시 성화나 더욱이 완전 성화가 아닙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믿음은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에는 반드시 마음과 삶의 변화가 따르지만 율법의 행위의 경우처럼 항상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화이며 성화 중에서도 완전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같은 수준으로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켜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불완전한 순종을 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갑니까?” 어떻게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회개나 믿음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의! 바로 그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를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만 덧입혀지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율법의 행위와 동의어가 아니라 바로 회개의 참됨을 보여주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그리고 믿음의 참됨을 입증해주는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시에 그 의가 율법의 행위처럼 완벽한 것이 아니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이해가 되시지요.

  한편, 저는 전에 극동방송을 통해 설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라는 설교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아직도 저를 오해하고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인 존 스토트의 글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율법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서 회중에게 윤리적 가르침을 전혀 전하지 않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사도들로부터 빗나가 있는가! '율법주의'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시도이다. '바리새주의'는 외형적이고 사소한 종교적 의무에 몰두하는 것이다. 복음에 광채를 더하는 도덕적 행위의 기준들을 가르치는 것은 율법주의도 바리새주의도 아니고 명백한 사도적 기독교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마 5:20), 이는 그리스도인의 의는 율법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피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율법의 영역이 실제 행위를 넘어서 말에까지 그리고 말을 넘어서 마음의 생각과 동기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인간의 전통에 외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정신과 마음으로 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2)

 

  이 글이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법적인 의가 아니라 율법을 행위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런 의가 없이는 그 누구도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성경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갖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은혜출판사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저의 처녀작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 한 가지 의문이 저의 가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25)

  저는 이 구절들을 설명할 때에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는 사변적인 믿음만으로는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며, 행함이 따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이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동을 한 것은 그가 의롭다 함을 얻은 지 약 30년 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가게 한 것도 혼자서 은밀히 믿음을 갖고 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근거로 처음부터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뭔가 부적절하다는 석연치 않은 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비교적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독교 중심”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책에서 오래도록 제가 간직하고 있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은 글로 자신의 논증을 시작합니다. 

  “우선 누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즉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는 사도 야고보의 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와 '의롭다 하다' 라는 단어 중 어느 한 단어는 사도 바울이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도 야고보의 취지는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서 가르쳤던 이신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가 각각 사용하고 있는 '믿음'과 '의롭다 하다'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해석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쪽의 주장은 다른 쪽의 주장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반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두고 한 쪽은 긍정하고 다른 쪽은 부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한 몇몇 구절에서 발생하는 논쟁의 관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사용한 '믿음'과 '의롭다 하다' 라는 단어 중에서 어느 단어를 사도 바울이 사용한 의미와 다르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 반론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조나단 에드워드는 어떤 이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라고 말하나 사실은 ‘의롭다 하다’ 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아쉽게도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한 가지 착각을 하였습니다. 1대지에서 이미 말한 대로 야고보와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행위’ 혹은 ‘행함’이라는 단어 둘 다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14절과 19절이 그 증거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러나 야고보서 2:24절에 나오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는 말씀과 같은 경우 여기에 나오는 믿음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주장처럼 바울이 말한 믿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둘 중의 하나만 다른 의미라고 본 에드워드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통해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믿음’과 ‘행위’뿐 아니라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도 바울이 사용한 것과 야고보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글과 야고보의 글에서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사용되었을까요?

  먼저,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일부 인용하겠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인정받고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언적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칭의는 우리가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나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양심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된 선고문이나 판결문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표명되는 것입니다.

  만일 칭의가 전자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다시 말해서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받는 것 자체로 해석된다면, 우리를 옳다 인정받기에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것만이 칭의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칭의가 후자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다시 말해서 그렇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의 표명으로 해석된다면, 우리가 그렇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와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모든 것들이 칭의의 근거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오직 믿음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받고 열납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모든 것이 다 똑같이 칭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칭의를 후자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믿음이 아닌 모든 미덕들과 선행들도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믿음과 동등하게 칭의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미덕들 곧 모든 거룩한 행실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고 옳다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음과 동일하게 증거 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입으로 표명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의롭다 하다' 라는 단어는 언제나 이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의롭다 하다' 라는 단어는 단순히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표명된 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는 때로는 전자의 의미로, 때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같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내적인 반면에 후자는 그 내적인 것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차이뿐입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모든 나라 사람들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일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다른 면에서는 두 가지 개념이 모두 일치하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외적으로 표현해주고 선언해준다는 면에서만 차이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그 두 가지 개념에 똑같은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입니다.

  가령, '판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단어의 경우, 때로는 우리 생각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판단만을 의미하고, 또 때로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 판단을 외적으로 증거하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롭다하다', '정죄하다', '받아들이다', '내어쫓다', '멸시하다', '인정하다', '부인하다'라는 단어들도 때로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의미하고, 때로는 그것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드는 사도 야고보가 선언적 칭의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의롭다 하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칭의를 선언적 칭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때,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옳습니다. 마치 나무가 좋은 나무임이 밝히 입증되는 것은 나무를 직접 진찰해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무에 맺히는 열매를 보는 것으로도 가능한 것처럼,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밝히 입증되는 것도 똑같다는 말입니다.

  사도 야고보의 취지를 생각할 때 이러한 견해는 더욱 힘을 얻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만일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신 줄 믿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을 믿으며 세례를 받았다면, 그것만으로 자신들의 구원은 안전하며 이제는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을 방탕한 삶으로 휩쓸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도 야고보의 목적은 분명히 이런 오류와 반대되는 진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도 야고보의 말을, “행위가 증거물의 자격으로 그리고 선언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를 의롭다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이것은 문맥을 정확하게 숙고해볼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야고보는 여기에서 행위를 강조하되 믿음의 필수적인 증거와 표시로서 또는 믿음의 참됨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맥에 분명하게 나타나있습니다. 가령 야고보서 2장 1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도 야고보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야고보는 “오직 믿음!”이라는 진리를 허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뿐만 아니라 순종으로도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도 야고보의 저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야고보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오직 믿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논리를 볼 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행위가 우리 칭의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믿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행위를 말하되 믿음과 관련된 것으로서만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믿음만이 유일하고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일하게 우리의 칭의에 관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들이 칭의의 조건으로 언급되는 것은 그것들이 믿음의 여러 가지 표현과 증거라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도 야고보의 말은 “행위가 증거의 자격으로만 그리고 선언적인 심판의 자리에서만 우리를 의롭다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더 심층적으로 확증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진실함을 인정하신 사건, 즉 하나님 자신의 판단을 선언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하나의 증거로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를 나타내는 말씀을 볼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칭의는 증거의 자격을 가진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 임이 분명합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 아브라함이 보인 순종의 실례가 언급된 다른 곳을 봐도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즉 참 믿음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 전부터 아브라함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수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행위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선언적인 의미로서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편,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2장 25절에서 또 다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읍을 전멸시키되 기생 라합은 살리라고 명하셨을 때 라합을 신자로 인정하신, 하나님의 선언적 판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 2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준 일은 라합에게 있는 믿음의 증거와 표현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야고보 사도는 라합의 인생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라합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라합을 신자로 특별하게 인정하신 선언적 칭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행위를 믿음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행위는 우리의 칭의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의 움직임과 활동이 몸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듯 믿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인 행위들로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에 나오는 것을 요약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설명한 후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신칭의 교리가 방탕한 생활을 조장한다는 반론이 자주 제기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함이나 탁월함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성경적 칭의 교리는 진실하고 복음적이며 총체적인 순종의 필요성이나 유익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안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순종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고 사람의 저주도 순종의 결핍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저주를 받는 것은 순종의 결핍 때문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순종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순종에 달려있습니다. 순종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준비입니다.

  영원한 축복들은 순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 자신의 양심 안에서 그리고 최후 심판 날에 우리의 칭의가 표명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상태에 있다는 합당한 증거인 순종에 달려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우리를 받아주실 때조차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순종을 고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마치 우리가 순종의 도덕적 탁월함을 인해 의롭다 함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순종에 철저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이 복음 체계는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그 어떤 복음 체계만큼 방탕한 삶을 억제하며 완전하고 총체적인 순종과 가장 탁월한 거룩함을 촉진시키고 격려합니다. 아니 실제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능력 있게 방탕한 삶을 억제하며 완전하고 총체적인 순종과 가장 탁월한 거룩함을 촉진시키고 격려합니다.”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나눈 말씀들을 온전히 흡수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나 ‘행위’ 뿐 아니라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도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판단은 하나입니다. ‘생각으로 한 판단’과 ‘입으로 한 판단’처럼 ‘의롭다 하다’ 라는 두 단어의 의미도 사실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둘은 칭의의 서로 다른 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다’ 라는 말을 전자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물론 바울이 말한 ‘의롭다 하다’도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적인 선언을 의미하나,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령을 꿰뚫어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믿음의 증거인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인정하고 선언하신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경우 칭의의 조건이 되는 것은 복음적 순종까지도 배제된(그것을 씨앗으로 품고 있기는 하지만) 오직 믿음 하나뿐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믿음은 단지 복음 진리에 대한 지적수긍이나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이고, 그리고 새 삶을 위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바로 그런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씨앗 혹은 뿌리의 형태로 그 안에 있으며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여기에 아직 가시화 된 행위가 들어가 있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최초의 순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맞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의롭다 하다’라는 단어를 후자의 의미(선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로서 믿음의 나타남이요 증거인 복음적인 순종(행함) 역시 칭의의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된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구분과 이해가 왜 중요합니까? 이것은 의외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으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게 해주고, 결국 ‘교리’와 ‘생활’ 모두를 바르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합니다. >

 

  이런데도 제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쳤다고 매도할 것입니까? 생각 없이 너무나도 쉽게 그런 말을 한 분들은 회개하시고 주님께 용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1) Ibid., p. 284.

 


2) 티모시 더들리 스미스 엮음 ‘진정한 기독교’ 정옥배 역. 서울: 한국기독교학생연합회, 1997. pp. 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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