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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인 동시에 오순절교회다

인내의열매 |

2008-10-29 00:00:00 |

조회: 229

모든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인 동시에 오순절교회다  



신사도행전적 성령운동 어떻게 봐야하나- 한세대 배현성 교수 인터뷰 -

'신사도행전적 성령운동', 소위 '제 3의 물결'은 과연 성서적인가? 



피터 와그너 박사(C.Peter Wagner, 풀러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교회성장학 교수)가 주창하고 있는 '제 3의 물결'은 표적과 기사를 중요시하는 성령운동의 흐름이다. 이는 기적적인 치유, 사탄의 권세로부터 벗어남, 하나님의 즉각적인 계시를 통한 예언의 은사를 중요시하는 운동으로서 현 한국 교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수 신학계의 비판도 거세다.

이러한 가운데 배현성 교수(한세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를 만나 '신사도행전적 성령운동'의 뿌리와 전망과 더불어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성령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해 보았다. - 편집자주



- 한국 교회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성령운동의 흐름 중에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어 쓰자', '사도행전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자'를 주장하는 '신사도행전적 성령운동'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성령운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령의 역사하심은 이 시대에도 변함이 없으시다.성령께서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통전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일부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역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은 정경화 작업이 끝나면서 마무리됐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미 완료되었기에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없고 다만 성경의 말씀에 우리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러한 주장들이 어떤 면에서는 성경에 대한 성도들의 깊은 인식을 요구하는 부분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의 역사와 활동범위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다만 성문화된 성경에 갇혀서 인간에게 보여지시는 분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며 시공간적으로 제약이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영원하시며 오늘도 내일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다만 초대교회 기독교적 교리와 시스템이 체계화 되는 데 있어서 남다른 계시와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역사되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초점을 특별하게 '사도시대 사도들에게만'이라는 특별한 단서가 붙는 개념으로만 단순화 시키고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기독교 신앙을 너무나 특수한 시대, 상황, 대상에 한계 짓는 것보다 보편화된 기독교의 교리적 진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인, 우주적인 교회'를 이야기 한다. '우주적인'이라는 것은 가톨릭에서의 의미는 '공교회'라는 말이다. 하나의 특정적 상황 속에서 그 진리가 갇혀있다기 보다는 그 진리는 아프리카에서도, 한국에서도, 남미에서도, 미국에서도 동시대적으로, 상황적으로 모든 면에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의 특성을 '특수성' 그 자체에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그 진리는 그 당시에도 연결되어지지만, 이 시대에도 보편적으로 그 신앙을 믿고 확신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역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더 성서적이지 않을까 한다. 성경의 말씀을 확신한다면 시대적으로 성령의 역사와 계시의 상황을 한정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열어놓는 것이 보다 더 성서적인 것이다. 

본인은 한국 교회를 두 가지 속성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모든 한국의 교회는 장로교회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제도적인 면,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 한국 교회 성도들이 장로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이 지녔던 장로교적 전통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요즘 들어 한국의 교회는 '너나할 것 없이 오순절교회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제도, 교단헌법, 교파에 따라서 여러 개로 나눠지지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분 없이 요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열려있다'는 말이다. 





이는 오순절 순복음교회의 기득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성장하는 교회,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고 역동성을 보여주는 교회들은 성령과 하나님의 계시의 은사에 대해 열려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보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는 다만 사도시대에 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너무나 제한하고 단순화하는 논리가 아닌가. 

물론 교리적 상황 속에서는 과거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한 장로교회의 보수적 특성들, 그리고 핫지나 워필드 같은 분들이 그런 주장들을 많이 했다. 소위 '은사중지론'에 대한 강한 입장을 보수 장로교에서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순절교회의 약진 이전에는 어느 정도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어느 교회나 성령의 사역과 활동에 열려있는 현실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현실적으로 목회하는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동떨어진 주장이 될 수 있다.





본인은 신학을 아무리 공부했고 스승이 그렇게 말했기에 그것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과 교회의 전통 속에 '그것이 영혼을 살리는가, 죽이는가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의 많은 신학자들이 독일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왔다. 그때 독일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소위 '사신신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죽었다'라고 하면 무슨 알맹이가 남겠는가? 





한국 교회의 정황에 맞게 그런 부분들을 숙지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과 부정적 인식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 당시 신학자들은 '사신신학'을 강대상에서 또 학교의 강단에서 외쳤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것들로 인해 신학과 신앙에 있어 농락당했다. 그것이 진보신학자들의 도전이었다면 지금은 보수신학자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혼선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습과도 같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활동력은 사도시대에 대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와 같은 활동들이 이어질 후대 크리스천들의 사역을 이미 바라보셨다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는 예수의 진리와 예수가 선포한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외칠 수 있는 '리틀 크리스천', '리틀 크라이스트'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계시와 역사하심을 단지 성문화된 하나님의 말씀에 한정시켜 놓고 너무 닫혀있는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재해석해 내는 데만 초점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은 돌비에 씌어진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 즉 '심비'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울의 깨우침은 돌에 기록되어 진 것과 같은 명시적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신득의', '성서제일주의'와 같은 개혁주의의 전통은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혁주의 신앙 안에서 '성문화된 말씀'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돌비의 영역과 함께 심비에 새겨진 말씀도 중요한 것이다. 이 시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길을 제시하시는 세계가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한 시간, 두 시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가이드라인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이 시대 세속의 문화를 이길 수 있겠는가?





이 시대는 '신학을 위한 신학'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신학', '삶 속에 어우러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교회를 발전, 성숙케 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계시의 제한성'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하심이 사도시대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인, 우주적인 교회'에 있어서의 보편성과 대치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갈망하는 누구나에게 보여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과 함께 병고침의 사역을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치료와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의 역사도 그런 논리로 제한한다면,기독교의 '티칭(Teaching)', '프리칭(Preaching)', '힐링(Healing)'이라는 3대 사역의 영역 속에 하나의 중요한 영역을 잃어버린 '절음발이 기독교'의 모습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이 정통교리이며 정통신학이라고 외치는 모순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한국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셨는데 우리가 더욱 겸손하게 가야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성령의 계시가 완료되었기에 이를 더 이상 확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보수 신학계에서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은사중지론'은 1990년데 많은 논란들이 있었고 이미 정리가 된 부분인데 이로 인해 또다시 보수와 진보, 또 보수 안에서도 이런 저런 입장으로 나눠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 21세기는 '영성의 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현재 많은 다양한 영성 집회들이 열리고 있고, 교회마다 새로운 영성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 하다. '진정한 영성운동'은 어떤 것이며 '빗나간 영성운동'과는 어떻게 구별가능한가.

영성에 대한 정의는 사람의 배경에 따라 굉장히 다르다. 가톨릭에서 '영성'에 대한 개념과 의미를 처음으로 소개했고, 개신교도 그런 부분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영성'이 이 시대 교회들에서 마치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성'의 개념조차도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것만이 참된 영성이고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되었거나 문제 있는 영성이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본인은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이미 답을 주셨다'라고 생각한다. 영성, 진리의 개념, 교회의 방향성과 자세 이러한 부분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다. 그것은 '열매'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비료를 줄 때 한 가지 비료만을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료 중 어느 하나만 주고 나무가 열매 맺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영성의 전부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무가 자라 열매 맺는 데는 다양한 종류의 비료가 필요하다.





본인이 영국에서 공부할 때 한 교수님이 표현하신 것처럼 '영성은 매우 관계적인 것'이다. 영성은 나와 하나님, 나와 나 자신, 나와 이웃, 나와 생태계의 관계를 말하며 이 관계가 원활한 사람일수록 영성이 뜨겁고 그 감화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 교부들의 영성은 매우 뛰어났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영성가로서의 교부들이 있었다. 나와 하나님, 나와 나, 나와 생태계 이 모든 관계가 원만하다보니 그것이 뛰어난 영성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스피릿(Spirit)' 즉 하나님의 수직적 관계에서 나오는 영성을 중요시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사랑이라는 '수직'과 이웃사랑이라는 '수평'의 영성이 통전적으로 조화될 때 나오는 그런 영성이 성경이 강조하는 참된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냄비'처럼 금방 뜨거워졌다 식어졌다 하는 신앙의 모습처럼 다양한 영성운동들을 바라보면서 임의로 정통이라고 했다가 금세 이단이라고 하는 경우, 이단이라고 했다가 정통이라고 경우도 많다. 한국 교회가 선교 120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내 것과 다르다 해서 금세 정죄하고 아니라고 했다가 맞다고 번복하는 그런 모습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들은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모습이 너무나 세속적으로 느껴지게 만들고 이런 것은 복음전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들이다. 주님의 가르침과 같이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 그가 영성의 대가이고 참이라면 그의 인생과 삶을 통해 드러나는 열매가 있게 마련이다.





한국 교회가 이원론화된 신학의 양태, 헬라철학과 같은 영지주의적 모순으로 기독교의 개념을 보기 보다는 통전적이며 하나님의 포괄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바라봐야 한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무조건 좋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측면에서 서로를 인정하면서 각각의 영성을 발전시키고 남이 가지고 있는 좋은 부분들을 내가 배우고, 또 내가 가진 좋은 부분들을 소개할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다원화된 시대 '이것만'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여러 중요한 영성의 요소들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서로 연합되는 것이 중요하다. 현 한국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연합'이며 이는 정체성 없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아닌 개체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영성운동이 되어야 한다.



- 방언, 신유, 대언, 환상 등 하나님의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과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은사는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대해 경험하기 전, 두려움과 더불어 부정적인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고 말한다. 은사를 한번 맛본 사람은 또 그것을 찾게 마련이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어도 별다른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은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차라리 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은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의미는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은사가 복음증거에 있어서의 유익함을 더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안에 주님의 은사와 성령세례 등에 관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 중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면 중에 하나가 은사를 자신이 잘나서 받은 것처럼 오해하고 사람들을 오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생각할 때, 선물과 같은 '은사'를 주신 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주님께 초점을 맞춘다면 은사에 대해 '이 은사는 뛰어난 것'이고 '이 은사를 모자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신앙의 여정을 가는 순례의 길과 같다. 은사를 받고 성령세례를 체험한 것이 완성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사람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오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맛보게 하신 것은 시작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를 완성이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점점 세속화 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굉장히 완악해지고 있는 시대다. 또한 최근 미국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많은 이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줄 수 있는 것이 단지 감정을 완화시키는 차원의 윤리, 도덕적 문제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궁극적 문제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기독교인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인 생명의 문제, 인생의 궁극적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것이다. 최첨단 시대로 나가면 나갈수록 영성을 요청하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은사들과 체험으로 우리가 무장해서 나간다면 마귀와의 싸움, 세상과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신사도행전적 성령운동'을 바라보는 신학자들의 다양한 신학적 관점의 차이들이 어떻게 하나로 모아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과거 한국 교회, 나아가 세계 교회는 교권주의적이고 교단적이며 교파 중심의 신학노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타교단과의 연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서로 연합해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하나 된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의 진리체계와 사랑의 의미들도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공통점을 찾아 나가야 하고 이를 많은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방법도 논의해야 한다.

이견들이 대립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마련해서 대화할 수 있도록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또한 '계시의 제한'과 '은사 중지'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을 한국 교회가 유념하면서 기독교의 진정성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영원하다'는 점에서각각의 교리적인 측면도 나눠봤으면 한다. 너도나도 '리바이벌 코리아'를 외치는 한국 교회 상황에서 단순히 '사랑하자', '협력하자'라는 구호에 그치는 활동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들의 불일치와 이견들을 하나 되게 하실 것을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 문을 서로가 열었으면 한다.



자료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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