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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의 시발점, 강단의 설교(김삼환, 김장환, 장향희, 한영훈 박사가 추천한 김경규 교수님의 책 중에서...)

겸손 |

2010-11-14 00:00:00 |

조회: 73

  초대교회와 다른 현대교회


  오늘날 현대 개신 교회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세상 사람으로부터 더 이상 기독교라 불리지 못하고 ‘개독교’라 불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개혁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뚜렷이 말하지 못합니다. 어디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초대 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다릅니다. ‘신학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요한이, 야고보가,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와 지금 교회는 분명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해 교회는 끊임없이 성결을 요구 받았습니다. 그리고 배교의 가능성을 주지시키면서 경고를 거듭했습니다. 사도들은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라’는 경고성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교회에서 “안전하다. 안전하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단상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목적, 착한 행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의 목적이 우리의 ‘거룩’이라는 설교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좇으라. 아무도 이것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44)는 말씀에는 침묵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설교는 줄기차게 합니다(엡 2:8).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 ‘우리는 전을 위해 지음(구원) 받은 존재요,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려고 구원하셨다’는 설교는 아예 안 합니다(엡 2:10).
..

 

   많은 설교자들이 ‘구원과 성도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거짓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주 유별난 성도가 아니고서야 누가 어렵게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겠습니까?
구원과 거룩한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불필요한 말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그 끝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지도 않고, 좁은 길로 걸어가라는 설교를 하지 않으니 성도들은 자꾸만 넓고 쉽고 편하고 화려한 길로만 몰려듭니다...

 

  교회개혁의 시발점, 강단의 설교

   교회의 개혁은 다름 아닌 바로 교회 강단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과 성도의 삶이 전혀 관련 없다’는 설교가 강단에서 계속 선포되는 한 교회의 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많이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어떻게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설교자의 신학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설교자의 구원론이 바뀌어야 합니다. 강단의 설교가 초대교회처럼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신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로부터 비롯된 구원론의 오해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오해는 개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루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 받는 믿음을 오해하고 말았습니다. 루터의 동료였던 종교 개혁자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은 “구원하는 것은 오직 믿음 만이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홀로가 아니다”라는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 속엔 믿음은 언제나 실제적인 선한 행실이 수반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놀랍게도 멜랑히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하루에 수백만 번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이 어린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는 죄는 없다”고 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받으시고 율법을 성취하셨으므로 은혜 아래 사는 자들은 도덕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와 같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곧 반 율법주의적인 것이기에 명백히 반 성경적인 것으로 비판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루터의 이러한 신학과 신앙은 그의 행동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는 야고보서, 히브리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신약 성경 중 4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성경들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약 성경 27권 중 23권만을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행위를 강조한 네 권의 성경을 그는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개신교의 아버지 격인 루터의 구원에 관한 신학의 한계가 오늘날 개신교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하튼 오늘날 개신교 교회가 ‘한 번 믿으면 어떻게 살든 결국 구원 받는다’는 루터의 구원론에서 구원 받지 않는 이상(以上) 교회개혁은 요원한 이상(理想)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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