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교회

전체메뉴보기 검색
통합검색 검색

교회소식

공지

목록보기

강제북송위기를 만난 4명의 북한 동포를 위해서 긴급한 중보를 부탁합니다.

겸손 |

2008-03-11 00:00:00 |

조회: 195

 

 

  강제북송위기를 만난 4명의 북한 동포를 위해서 긴급한 중보를 부탁합니다. 3월 14일 금요일 10시에 효자동 중국대사관 건너편 옥인교회 앞에서 이분들의 강제북송금지 시위와 후진타오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 전달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참여 또한 부탁드립니다.

                                -Peter Jung-

 

  미국에서도 북한인권관련 단체들이 이 4명을 위해서 동일한 긴급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론>

  아래 4명의 탈북난민들(여성 3명, 남성 1명)은 중국에서 은신하던 중 2008년 3월 첫째 주, 한 유럽인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중국에 숨어 지내며 직면해야 했던 끔찍한 상황을 증언했다.

 

  그러나 이 네 명 중 두 여성은 3월 5일 수요일 밤 7시경, 그들의 사정을 딱하게 본 한 남한 사람과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셴양시의 시탑군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서른 명 정도의 힘센 중국 사복경찰들이 이 탈북여성들과 남한시민이 있는 곳에 요란하게 쳐 들어와 굉장히 과도하게 과잉 진압하였다.

 

  다음 날인 3월 6일 목요일, 이 두 탈북여성은 다른 두 탈북난민(여성 1명, 남성 1명)과 경찰버스에 강행되어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다. 추측하기로는 탈북난민으로 가장한 한 북한 보위부의 간첩행위로 인하여 중국당국의 체포가 이루어진 것 같다. 우리는 다른 이 두 탈북자들이 어떠한 경로로 체포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아래의 프로필은 체포된 탈북난민들로부터 하루 전과 체포 당일 입수된 정보이다.

 

 

  북한 로미오와 줄리엣

 

  저는 북한출신이고 현재 서른 살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예술가이자 작가이셨고 어머니는 그냥 평범한 주부이셨습니다. 저는 북한의 한 지방에서 자랐습니다. 1994년에 고등교육을 마쳤고 1996년 7월 어느 날 아침 6시경 아버지와 함께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는 날까지 직장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3명의 사복을 입은 보위부가 우리 집에 쳐 들어와 우리를 도 보위부원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어머니는 체포되지 않기 위해 아버지와 강제로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위부실에서 저는 아버지와 떨어져있게 되었고 제 생활과 그리고 친구들에 대해 적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정말 바보 같았습니다. 제가 쓴 글로 보위부들은 만족 해 하지 않아 무거운 사슬에 묶여 있는 저를 발로 차고 구타하며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쓰게 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죄목으로 끌려왔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보위부에서 그렇게 한 달쯤 지나, 저와 아버지는 족쇄에 묶인 채 어느 곳으로 끌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끔찍한 요덕수용소 15호 관리소였습니다. 그 곳은 정말 생지옥 그 자체였고 끔찍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노동량은 매우 많지만 배급식량은 그에 비해 말도 안될 만큼의 소량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집에 머무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감자밭에서 일하여 보냈습니다.

 

  관리소에서의 4년 동안, 공개처형 장면을 한번도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3명의 수감자들이 사라졌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1999년 4월 어느 날, 저와 아버지가 한 언덕 주변에서 땔깜을 모으고 있는 동안 3명의 무장 경비원들이 나타나 우리를 구타하고 총대로 얼굴을 마구쳤습니다. 저는 바닥으로 거꾸러져 거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까지 이르렀고, 아버지 또한 구타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를 한 20분 가량 구타했습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저를 집으로 업고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깨었을 때, 아버지가 제 옆에 누어 계셨지만 심하게 상처를 입으셨었습니다.

 

  제가 정신이 들었을 때가 저녁쯤이었고,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동네에 30명 정도의 수감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기억하기로는 한 중년 여성이 일러주기를, 한 젊은 남성이 반항했다는 이유로 생매장 당하는 것을 보았다며 저에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의 부상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2000년 11월 어느 날 제가 석방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머니와 저는 곧 멀리 떨어진 황폐한 산자락의 농촌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한 1년 후,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들와 여자 친구를 만났고 고향으로 발각되지 않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종종 제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고 결국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2007년 9월 초에 남한으로 새로운 삶과 자유를 위해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와 제 여자 친구는 국경까지 7일 동안 꼬박 250킬로미터를 걸어 2007년 9월 29일 새벽에 국경을 넘었습니다. 중국 리아온링주의 셴양시에 도착했고, 대한민국 영사관에 몰래 진입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한인타운에서 은신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직업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현재까지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 여자 친구는 청소부로, 세탁소에서 혹은 가정부로 직업을 구했지만 중국사람들에게도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의 절반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 안전 문제 때문에 여자 친구 또한 직업을 두 번이나 바꿔야 했습니다.

 

  2007년 12월, 여자 친구는 호스텔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탈북여성을 포함하여 5명의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북한 사투리로 말을 했고, 약간의 중국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여자 친구가 중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주인의 중국어가 얼마나 유창한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어를 잘 읽진 못했습니다. 주인은 중국과 북한 사이를 자주 왕래 했습니다.

 

  2008년 2월 27일, 호스텔 주인이 제 여자 친구를 방 한 구석에 감금하여 저와 헤어지고 한족 남자와 만나 살라고 설득했습니다. 바로 제 여자 친구를 매매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이틀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직장에 찾아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들은 제 여자 친구가 거기 없다며 소리치며 다짜고짜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2008년 3월 1일, 여자 친구는 간신히 그 집에서 빠져 나와 우리 은신처로 돌아왔습니다.

 

  호스텔 주인에게 전화가 왔고, 그는 우리에게 상당한 몫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해서 호스텔에 갔더니 남자는 없었고 여자들만 있었습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두 젊은 남자들이 따라 들어와 두 시간 가량 우리를 구타하고 발로 차며, 만약 제 여자 친구가 거기에 남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요구에 반항하였고 우리를 끝내는 풀어줬습니다. 우리 둘 다 심하게 다쳤습니다. 특히나 제가 너무 심하게 부상당해서 제 여자 친구 도움으로 은신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들을 돕는 인도주의 활동가들을 만난 오늘 2008년 3월 3일, 우리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중국한족 남성의 아내이고 마을 주민들과 공장 사람들의 강간의 위협 아래에 살아왔습니다.

 

  저는 북한 함경남도의 작은 마을 출신인 서른 살 된 탈북여성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고 1998년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6남매 중 넷째 딸입니다. 1994년 고향에서 중등교육을 마쳤고 정부의 행정원으로 5년 동안 근무했었습니다. 2000년 10월, 심각한 식량난으로 어렵게 살고 있던 저희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재정으로 도움이 될까 하는 소망으로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는 중국 샨동주에 있는 외진 마을의 한 한족 농부에게 팔려갔습니다. 이 가난한 한족 남자의 아내로 7년 동안 같이 동거하게 되었고, 우리에겐 두 살 된 딸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가난한 한족 농부의 아내로서의 삶은 너무 비참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까운 공장에서 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법적 보호대상자가 아닌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공장의 중국인 노동자들이나 마을 주민들은 항상 저를 강간 할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 남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강간하고자 하는 의도로 저를 늘 괴롭히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2006년 6월, 그 남자가 술에 취해 저에게 다가왔고 저는 그 남자를 뿌리쳐야 했습니다. 그 남자가 화를 내더니 저를 세 번이나 칼로 찔렀습니다. 그 중에 한번은 너무 심하게 찔러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이 끔찍한 상처는 지금이라도 보여 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댁 식구들이 저를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시켰고 저는 거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에 대해 걱정 해 주지 않았고 동네 주민들은, ‘저 여자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죽어도 문제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저는 너무 화가 났고, 다시금 저는 제가 중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단지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는 2008년 서른 세 살이 된 탈북여성입니다. 1992년 제 고향 북한 청진에서 중등교육을 마쳤습니다. 아버지는 보일러공으로 1996년 사망하셨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습니다.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1년 과정의 직업훈련을 받고 몇 년간 공장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2002년 9월 16일 중국에 좋은 일자리가 있어 소개 해 주겠다는 거짓 약속에 속아서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그 당시를 떠올리자면, 저는 가난에 찌들린 어두운 세상인 북한에 대해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저는 샨동주의 외진 마을의 40대 한족 농부와 결혼하게 되었고 현재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습니다. 남편은 빈번히 술에 취해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저를 때렸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중국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남편과 대화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종종 중국공안에게 신고해서 체포되지 않기 위해 세 번이나 집에서 도망 나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를 보호해 주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제 남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인간 이하 혹은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더 이상 짐승과 같은 취급에 견딜 수 없어 한 인권활동가의 도움으로 2008년 2월 27일 그 마을에서 떠났습니다. 저는 다시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이번이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제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지 다시 인간이 되고 싶은 것뿐입니다. 제가 다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후에야 제 미래에 대해 계획하고 결정할 것입니다. 동네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마을을 지나갔고, 다행히 동네 주민들의 눈을 피해 그 버스를 잡아타고 두 시간 가량 떨어진 동네로 이동했습니다. 이번이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음글 할렐루야! 변승우 목사님의 신간 "꺼져가는 등불, 양심"(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 추천)이 새로 나왔습니다. 예세 2008-04-05 00:00:00
이전글 수만 명 '두만강 심청'들을 어찌할 것인가? 겸손 2008-03-04 00:00:00

공유하기 닫기

url로 공유시 전체 선택하여 복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