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생각 |
2009-07-14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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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받기 전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죄성
2006. 7. 10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언을 분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 예언이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가 아니면 절망하게 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악한 영들에게 온 예언은 절망감을 줍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잘못된 사람에게 예언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 예언을 받고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너무나도 힘든 일을 겪고 있었는데 앞으로 평생 세 번 이런 일을 더 겪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세 번이나 이런 일을 어떻게 당하나.”하는 깊은 절망감이 들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잘못된 예언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런 예언은 정죄하는 영, 참소하는 영에게서 나온 것이라서 항상 부정적인 면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선지자들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과 정죄하는 것은 다릅니다. 회개는 사랑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설교나 예언을 할 때 사랑해서 말하는 것이 느껴져야지, 그것이 없으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잘못된 사람에게선 그것이 느껴지지 않고 죄를 지적하며 겁을 주고 심판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원수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회개를 외치지만, 회개를 외치고 난 후 반드시 소망을 줍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시고 쓰실 것이라고,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지만 끝에는 반드시 위로와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언은 과거와 미래를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사랑으로 돕고 세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알아맞히고 예언하는 능이 있으면 사람 앞엔 대단해보일지 몰라도, 정말 사람을 세우고 살리기 위해서 사랑으로 예언하지 않으면 하나님 보실 때엔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변 전도사와 예언사역자들에게 자주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정죄의 영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자꾸 사람들의 나쁜 점을 보지 말고 사랑해라. 예언자가 되지 말고 사랑하는 자가 되라. 사람을 돕고 세워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자나 사역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 여기서 구하라는 대상은 모든 은사이고, 확대시켜 해석해보면 모든 사역입니다. 은사로 사역하는 것이기에 모든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은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사랑에서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목사님과 대화하는데, 제가 영성운동 하는 교회 중에 큰 교회가 많지 않다고 하니 영성운동하면 교회가 클 것 같은데 왜 그러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군중은 사랑하는데 한 개인을, 한 영혼 영혼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언할 수는 있지만, 병은 고치고 표적은 나타낼 수 있지만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신유집회나 예언집회를 열어 아픈 자들과 성도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병 고쳐주고 예언을 받도록 섬기지 않고, 헌금을 목적으로 또는 그런 집회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사역과 입지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에 부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 부흥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성운동을 하지 않고 은사가 없어도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들이 있는데 그런 교회는 부흥합니다.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는 사역은 다 모래 위에 세운 사역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사역을 잘하고 기적과 표적이 많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집회를 나갈 때 저를 초청한 목사님을 조심스럽게 봅니다. 그 목사님의 영성이 바르지 않으면 다시 초청해도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용만 당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오시는 강사들도 이용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언을 비롯해서 어떤 사역도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서 어떤 죄인이라도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하자. 나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 내가 많은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여 용서받고 축복받고 쓰임받자.’ 이렇게 되어야 예언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예언 받고 난 후에 시험 들고 우거지상이 되었다면 예언을 잘못한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로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예언과 모든 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 중에 너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 때문에 쳐야 될 것은 쳐야 된다고 말하지만 진짜 사람들을 치기만 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말씀을 타협하지 않고 전해서 찔림을 받게 하는 것과 말씀으로 성도들을 내려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이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전해서 진리 자체가 사람을 찌르면 회개가 일어나지만, 목사가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치기 시작하면 회개가 아니라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떠나갑니다. 제가 찌르고 치는 것 같아도 제 설교를 통해 회개는 해도 상처 받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아십니까? 말씀을 타협하지 않고 말씀 자체로 찌르지만 소망을 주고, 죄를 가르쳐주지만 정죄하지 않고, 회개하면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너무도 우릴 사랑하시어 회개하면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들과 조합을 이루어 설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치는 설교와 찌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좋은 얘기만 하는 것은 거짓 소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런 거짓 소망이 아닌, 지적할 건 지적하면서도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 자체가 정죄형, 비판형의 사람은 예언자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설교나 예언을 들으면 자기가 정죄 받고 비판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지식보다도 감정으로 먼저 반응하기 때문에 머리로는 저 사람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도 감정으론 나를 비난하고 있다고 느끼면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마음이 닫혀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는데 지식을 통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알게 되고, 감정을 통해 그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고무가 되고, 의지를 통해 결단을 내리고 나아가게 됩니다. 옳은 얘기를 하는 것만 가지고는 사람들을 못 움직여요. 지식만이 아닌 감정을 가져야 되는데 사랑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으로만 그 감정을 만져서 올바른 결단을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서울에 큰믿음교회가 생겼을 때, 저는 설교 중에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적대감이 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메시지가 여과 없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아이를 때리면서도 부모가 화가 나 있으면 교육이 되지 않듯이, 회개하라 외치며 목사가 화가 나 있으면 성도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사랑이 충만한 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당신의 아들을 보냄으로 시작한 사랑의 일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는 영원 전부터 예수님이 죽임 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영원 전부터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내어놓기로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벌써 예수님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벌써부터 자기 자식을 죽인 것입니다. 그 사랑에서 모든 기독교 사역이 출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없이 말씀만 있다면 설교자가 아닙니다. 이 사랑은 없고 예언, 신유만 있다면 예수장사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주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고 돕기 위해 사역을 할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닮기 보다는 참소하는 영인 마귀와 성향이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케네스 해긴 목사님 책에 보면 어떤 목사가 비서와 부적절한 관계가 맺었습니다. 이것은 있어선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을 누군가 이것을 말했을 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몇 년 전의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꺼낸 사람이 15년 전의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해긴 목사님은 그 목사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을 것이고 회개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일인데 그 일을 15년이 지난 지금 왜 얘기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목사가 간음을 했다면 평생 낙인이 찍히는데, 이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닙니다. 사탄의 속성이고 지옥 문화입니다. 이런 지옥 문화가 한국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만일 그 죄를 지은 일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면, 사역을 내려놓고 깊이 회개하며 영적으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회개한 일이라면 교회도 그 사람을 예수님의 피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보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봐야 합니다.
“너희가 내게 와서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나주시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간증을 듣고 부러워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불신앙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찾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만나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시니 간절히 찾고 기도하십시오.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으로는 못 받습니다. 욕심으로 기도하면 생떼를 부리고 그 틈에 악령이 임합니다. 욕심이 아닌 사모함이 강하면 간절히 찾고 찾습니다. 그것이 접촉점입니다. 그냥 설교 듣고 통성 기도 시간에 잠깐 기도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듣다가도 은혜를 받고 통성 기도시간에도 받는데, 어떤 사람은 작정기도, 금식기도해도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데 전자는 설교를 듣고 있어도 그 마음이 기도자체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고 찾는 마음으로 그 마음이 포화가 된 상태이면 기도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설교 듣다가 주님께서 열어주시고 부어주시고 만져주십니다. 똑같이 설교 듣고 기도하지만 간절히 주님을 찾는 것에 사무쳐서 응어리져 있으면 주님이 중심을 보시고 만져주십니다. 그리고 후자는 작정기도를 해도 간절히 찾고 찾는 것 없이 시간만 끕니다. 욕심이나 얄팍한 사모함으로 그냥 구해보고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지, 길게 기도하는 시간싸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했는데 주님과 무척 멀어졌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겐 안주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적반하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왜 너는 간절히 찾고 찾지 않느냐? 왜 너의 기도는 항상 그렇게 깊이가 없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사모함이 약해서 조금 기도하다가 자기의 사모함이 누그러지면 그것이 그 사람에겐 응답입니다. 거기에서 기도가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못 만나는 것입니다. 간절히 찾고 찾으면 다 만납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원하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간절히 찾고 찾으면... 의인의 간구함은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이 모든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찾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방문하신 목사님은 제 책과 설교를 통해 관점이 완전히 바뀐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 예언사역을 받는데 자신을 전혀 모르는 평신도임에도 대부분이 “목사님, 말씀에 관해서 보는 것이, 목회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셨네요. 완전히 바뀌어서 이젠 전으로 돌아갈 생각도 돌아갈 수도 없네요.”하고 예언해주어서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영계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은사, 영적체험, 하나님의 큰 은혜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거리가 아닌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영어 성경을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네 손닿는 곳에 와있다’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은혜와 영적 체험도 간절히 찾고 찾음으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안수 기도를 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는데 안수를 왜 하나? 그냥 주님이 나를 통해 만져주시도록 기도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진짜 깊은 은혜는 안수를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하나님과의 1:1 관계입니다. 말씀 듣고 깊이 회개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찾으면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간혹 안수를 통해 기름부음이 흘러들어왔다고 간증하시는데 목회자가 양심적이면 그 말에 속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사모하는 마음이 목회자가 손을 얹었을 때 접촉점이 된 것입니다. 마치 스위치가 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전기가 불을 켜는 것인 것처럼 목회자의 손은 스위치 역할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그 사람의 사모함과 간절함을 보시고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안수를 주님이 만져주시라고 합니다.
말씀 듣고 성도들이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찾으며 기도하면, 그것이 안수보다 7배나 좋습니다. 기도 인도도 조금만 기도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주면 성도들이 기도 인도를 따라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깊이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이 만나주시고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변화가 일어나고, 은사가 임하고 특별한 영적 체험이 일어납니다. 안수 못 받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간절히 찾고 찾아야 합니다.
저는 요즘 저의 부족 때문에 늘 울고 삽니다. 밖으로 눈물을 흘리진 않지만 나의 영으로 잠잘 때나 사람들과 대화할 때나 설교할 때 늘 울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이나 기도 제목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께 합당한 도구가 될 것인가? 에 대해 영성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이 많이 부족하기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요즘 더 심각하게 저 자신의 부족에 대해 기도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준비하고 계시고 나 자신이나 우리 교회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나의 심령에 통회함을 주시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자기의 의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죄와 부족을 깊이 깨닫고 통회할 수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정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소망을 갖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뀌어야 새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뀌지 않고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은사가 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바뀌면서 은사들이 임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사나 능력주시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주시는 것이지요. 신유나 믿음의 은사를 주시어 기적을 일으키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주의 일이 흥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은사를 그토록 주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해서 부흥이나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이나 많이 구원하고 주의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냥 은사를 주면 무너집니다. 우리에게 그냥 능력을 주시면 우리의 교만, 허영심, 드러나지 않은 이기심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 벌기 전엔 잉꼬부부이고 잘 살다가도 남편이 돈 잘 벌면 바람을 피웁니다. 우리 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드러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것, 잠복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은사가 임하면 드러날 것들이 있고, 부흥이 임하면 드러날 것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한국의 대형 교회 목사님이 전엔 그러지 않았지만 교회가 부흥하고 변질된 것에 가슴 아프다며 변 목사님도 지금은 좋은데 나중에 크게 부흥하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고 누가 말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가지지 않았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고, 부자가 되기 전엔 드러나지 않는 부패한 것들이 있습니다.
가난할 때엔 자기도 모릅니다. 은사가 임하기 전에, 깊은 영적 체험을 하기 전에는, 부흥하기 전, 유명해지기 전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아닌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냥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처음엔 저에게도 그런 속성이 드러났었지만 지금은 교회가 부흥이 되면 될수록 저 자신에 대한 부족을 느끼고,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제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손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내 부족과 연약함을 이용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이 “내가 너에게 진짜 많은 사람을 붙여줄 때, 진짜 네게 능력과 기름부음을 부어줄 때, 진짜 많은 재정과 명성과 영향력을 줄 때, 그때에도 변질되지 않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전혀 변질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너의 연약한 부분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로 제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교회가 부흥되어도 제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 않습니다. 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오신 목사님께서 제가 이 교회로 온지 1년 3개월 만에 400명이 모인 것에 대해 질문하기에 “목사님, 그건 그냥 은혜예요.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워낙 좋은 개척 멤버들을 붙여주시고 좋은 성도들을 보내주시고, 내가 부족해도 그냥 주님이 역사하셔서 그 은혜로 된 것이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저 때문에 된 것이 전혀 아니고 나 같은 걸 써주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제 중심의 고백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커져도 제가 제 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 명이 되고 십만 명이 되면 그건 진짜 더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백만 명이 되어도 그건 더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그것 때문에 제가 커지거나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 그런 은혜를 부으시고 주님이 역사하신 것인데, 너무 감사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바짝 낮추고 나 같은 것을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백할 일이지 그것 때문에 높아질 일은 저에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주셨기 때문에 된 것이며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음 서울에 큰믿음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니 교만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부터 주님께서 이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내 영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 마음이 높아지거나 하는 것이 예전엔 싸워야했는데 이젠 내 속에서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아무리 성장해도 변질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사람들은 변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냥 큰 은사와 큰 은혜, 부흥을 주시면 그건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주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위해서 구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변질되고 삯꾼이 되고 교만하고 패망하여 지옥 간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새로운 일은 우리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새로운 일은 은사나 갑자기 불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되지 않고 불 받고 축복 받으면 교만해져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내 영을 살피고 내가 변화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새 일은 내가 변화 받는 것에서부터, 내 마음이 깨어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요지부동상태에서 어떤 은사나 부흥도 원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뀌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하셨고 일꾼과 종들을 너무 필요로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영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모세에게 능력을 주신 것처럼, 바울에게 희한한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신 것처럼, 너에게 줘보자. 하시도록!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얼마나 주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저만 해도 온전한 사랑은 아니지만 좋은 책 있으면 설교 끝나고 소개해도 될 것을 먼저 소개해서 읽도록 하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주고 싶어 하시겠어요? 영과 마음, 성품과 기질,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목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변화되어야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제일 큰 은혜인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사역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사랑 없이 은사를 구하고 사랑이 없이 어떤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많은 영성운동하는 교회들이 예언도 있고 신유도 있고 축사와 방언통변 등 많은 은사가 있지만 부흥이 되지 않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역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역 자체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어제 저를 찾아온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기도해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 이분 마음속에 사랑을 주셔서 이분의 설교가, 이분의 사역이 사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은사가 단순히 은사가 아닌 사랑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사역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우리 속에 더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우리의 가슴을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께 제대로 쓰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주님,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간절히 찾고 찾으면 누구나 만나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누구나 은사주시고 사용해주시는데 우리의 영이 바뀌지 않고 기도해서 은사 받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의 영이 바뀌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바뀌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여주시옵소서. 자기를 완전히 비우게 해주시옵소서.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주님만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성품으로 옷 입게 해주시옵소서.
우리가 입어야할 전신갑주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신갑주의 모든 특성은 예수님의 속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의 성품으로 옷 입고 무장할 때 마귀가 공격할 수 없고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옷 입는 것이 완전한 전신갑주요 무장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갖고 있다고 검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믿음이 있다고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충만할 때, 그것이 진정한 무장인 줄로 믿습니다. 그때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무장시켜주시옵소서.
지금은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큰 은사와 축복을 주실 때 드러날 우리 속의 부패한 속성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큰 사역을 맡겨 주시고, 높여주시고, 널리 알려주시면 고개를 들고 드러나게 될 우리 속의 부패한 속성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것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연단시키시는 것이므로, 빨리 깨닫고 그것들을 주의 은혜로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으키시길 원하는 위대한 사역들을 위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다윗의 고백처럼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나를 아시옵소서. 나를 감찰하시고 나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여 우리 속에 처리될 것이 처리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준비되고 쓰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됨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 받기 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됨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원수 마귀와 싸우기 전에 원수 마귀의 기질과 속성들, 우리 속에 있는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고는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없음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다윗처럼 주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하여주시옵소서. 변화되게 해주시옵소서. 달라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사울이 처음 볼 때엔 겸손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권력이 주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에게 권력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 속에 숨은 교만들이 드러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난 후 숨어있던 가라지가 싹을 트고 움을 트고 잎을 펼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 있던 교만, 탐욕, 잔인함과 이기심이 그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처리하지 않고 사울처럼 기름부음을 받고, 은사를 받고, 높이 쓰임을 받는다면 똑같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분명하게 처리하게 해주시옵소서. 캐내게 하여주시옵소서.
다윗처럼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단순히 기름부음 받는 사람이 아니고, 단순히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고,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살피셨을 때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도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살펴주시고, 심판해주시고, 보여지기를 원하는 기도의 과정 속에서 가라지가 제거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우리가 다윗과 같이 준비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런 과정을 밟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정말 주님 앞에 보배롭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한때 쓰임 받고 버림 받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쓰임 받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하신 것을 다 이루고, 승리자가 되어 천국에 가서 큰 자가 되려면 성공하기 전에 드러나지 않는 우리 속의 가라지를 제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역사하여주시고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 다윗처럼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일평생 쓰임 받은 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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