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의열매 |
2011-06-19 00:00:00 |
조회: 452
2002년 가을학기
웨슬리학회 심포지움
칼비니스트와 웨슬리안의 예정 이해
- 발제: 1. 칼비니스트 입장 (장신대 이형기 박사)
2. 웨슬리안 입장 (나사렛 임승안 박사)
-논찬: 장신대 노영상 박사, 감신대 김홍기 박사
▶행사 순서◀
▷사회: 이성민 박사
▷발제: 1. 칼비니스트 입장, 이형기 박사 2. 웨슬리안 입장, 임승안 박사
▷논찬: 노영상 박사, 김홍기 박사
▷토론
▷회장인사: 조종남 박사
▷축도: 조종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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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2002년 11월 5일 (화) 오후 4 : 45
곳: 감신대 100주년 기념관 3층 시청각 교육실
한국 웨슬리학회
개혁신학 전통의 예정론
장로교신학대학교 이 형 기 교수
Ⅰ. 칼빈의 신학사상에 있어서 예정론 :
1. 기독교 강요 최종판을 읽는 시각 :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
1528년 Olivetan(혹은 Pierre Robert)의 프랑스 말 신약성서의 서설
1529년 루터주의자 Wolmar
1533년 파리대학 총장의 연설문
1539년 Sadoleto에게 주는 편지
1528년 루터의 ??The Small Catechism?? : 율법과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 : 1537년 카롤리와 1531-1533년까지의 세르베투스
사도신경
2.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 : catechetical and apologetic intent(복음과 교리문답) ; 예정론이 교회 정의를 위해서 사용됨;
1537년 ??제네바 교리문답?? : 예정론의 목회적 의도
3.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에 있어서 “예정론”의 신학적인 자리 매김
1. 신론(God the Creator); 2. 구속주 하나님(God the Redeemer); 3. 성령론(The Way in Which We Receive the Grace of Christ : What Benefits Come to Us from It, and What Effects Follow); 4. 교회론(The External Means or Aids by Which God Invites Us Into the Society of Christ and Holds Us Therein).
2. 예정론은 제3권에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unio mystica cum Christo로부터 나오는 이신칭의와 성화를 논한 다음에 나오고, 제4권의 교회론에서 교회를 정의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칼빈의 예정론의 신학적인 자리 매김은 어거스틴의 경우, 펠라기우스 논쟁에 관련된 은총론 혹은 구원론과 도나티스트 논쟁에 관련된 교회 정의(universus numerus praedestinatorum)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과 같다.
3.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와 불 가시적 교회(invisible church)(하나님만이 보시는 교회)
4. 교회의 표지(말씀설교+세례?성만찬+신앙고백+삶의 모범)과 “사랑의 판단”(iudicium caritatis)
5.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예정론”에 대한 본문들 :
자료 : 기독교 강요 요약, 이형기 옮김(서울 : 크리스쳔 다이제스트, 1998), 제3권 21-24장(pp. 334 이하).
제21장
영원 전의 선택 :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택정하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멸망 받도록 택정하셨다.
칼빈은 1559년에 출판된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교리를 제Ⅲ권(성령론 혹은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의 끝 부분과 제Ⅳ권(교회론) 직전에서 취급하였다. 즉, 칼빈은 신론이나 기독론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화해를 적용하는 부분 내지는 구현하는 성령론 부분에서 다루었다. 이 성령론 부분은 이신칭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 성화, 기도 등의 교회의 특수경험과 떨어질 수 없는 경험이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대한 경험이다.
예정론은 구원론과 함께 취급되어야 한다. 결코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누구를 어떻게 예정하셨는가에서 출발하면 안될 것이다. 어거스틴과 루터 역시 이 예정교리를 은총론 혹은 구원론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칼빈은 적어도 어거스틴과 루터의 계열, 무엇보다 바울의 로마서의 내용구조를 따르고 있다.
로마서의 내용구조는 다음과 같다. 즉, 롬1-3 : 20은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고, 롬3 : 21-6장은 은혜와 신앙으로 칭의 얻는 구원론을 취급했으며, 롬7장은 기독교인의 좌절과 갈등을, 그리고 8장은 좌절됐던 기독교인의 승리, 혹은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단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9-11방에 이르러 비로소 바울은 예정교리를 논하였다. 그리고 로마서의 나머지 부분은 기독교 윤리를 취급한다.
1-4절에서 칼빈은 예정교리는 중요하기 때문에 이에 관하여 주제넘게 말을 하거나 혹은 전혀 침묵을 지키는 것이나 모두 다 잘못됐다고 한다.
칼빈은 복음을 설교할 때 어떤 이는 수용하고 어떤 이는, 수용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정하심의 현상이라고 본다. 이처럼 칼빈의 예정론은 목회현장의 경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실제로 생명의 은혜언약을 설교말씀을 통해서 선포할 때 누구나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오한 결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확실히 이와 같은 차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단을 말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대하여 알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자비의 샘터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지 않고 어떤 이에게는 다른 이에게 주시지 않는 것을 주신다고 하는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밝히 말해 준다.(Ⅲ.xxi.1)
5-7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믿는 개인들과 관련시켜 예정교리를 정의한다.
칼빈은 먼저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32: 8).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택정하셨다. 즉, 하나의 민족은 여호와가 택하셨으나 다른 민족들은 버리셨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과 자비에서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 : -8)(Ⅲ.xxi.5).
다음에 칼빈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선택에 이어 이스라엘의 개개인의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논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서도 어떤 이는 구원의 선택을, 어떤 이는 유기 하셨다. 예컨대 하나님은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은 버리셨으며,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유기 하셨으며, 다윗은 택하셨고 사울은 버리셨다. 즉,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리고 말1 : 2 - 3과 롬9:13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Ⅲ.xxi.6).
칼빈이 복음과 성령을 통한 부름, 칭의에 관련시켜 오직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은혜의 선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때 논리적으로 그는 이중예정교리를 말했다고 우리는 보아야 한다.
성경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 불변하시는 계획에 의하여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일단 결정하신 자들을 정하셨고 다른 한편 멸망에 넘길 자들을 도한 정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무조건적 자비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가 멸망에 처하게 하신 무리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문을 폐쇄시킨 것은 그의 의롭고 비난의 여지없는 불가사의한 판단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부름 받는다고 하는 것을 피택자의 표시로 보며 칭의 역시 택정하심의 다른 표시인 바 피택자들은 결국 부름 받아 칭의를 얻고 영광에 돌입할 것이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성화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 즉, 부름 받음, 칭의, 영광이 유기된 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Ⅲ.xxi.7).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과 성화의 경험과 확신이 택정함의 경험과 불가분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사죄와 칭의를 얻고 하나님과 화해의 관계 속에서 날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이 하나님의 신비한 예정을 고백한다. 그러나 결코 인간은 누가 유기 되었는지 궁극적으로 판별할 수 없을 것이다.
제22장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들
1-6절에서 칼빈은 선택을 공로에 대한 예지와 구별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칼빈은 다음의 성경귀절들에 근거하여 예정 혼은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결코 인간 자신의 그 어떤 공로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2),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히1:2)
칼빈은 위의 성경귀절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선행의 공로를 미리 보시고 예정하셨다고 하는 예지예정을 거부한다. 칼빈은 예수님께서도 이 지상에서 무슨 선행의 공로를 세우시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피택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칼빈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정 혹은 선택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공로를 보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은혜로 택정하신 것이다(Ⅲ.xxii.1).
“창세 전 피택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공로를 제외시킨다. 우리가 이미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고 흠과 티가 없게 하시려고”택정하셨다. “그 기쁘신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엡1:5) 그리고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우세함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이 선택이 값없이 되어진 것이니 우리의 피택은 전적으로 은혜라는 것을 선포할 만 하다”(Ⅲ.xxii.2)고 본다.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느니라”(요15:16)고 말씀하셨다.
특히 칼빈은 롬9-11장을 예정론을 위한 중요귀절로 보고 롬9:11에 호소하면서 9:11-13을 인용한다.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조상 이삭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다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보시고 불러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된 성경의 말씀대로 입니다.”(Ⅲ.xxii.6)
그리고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지상적 복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피택된 자의 표징들이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7-11절에서는 예정의 성경적 근거를 반대하는 자들의 이론을 반론한다.
우선 칼빈은 이 선택에 대한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을 소개한다. 즉, 신약성경의 증언이 소개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며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요17:6),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13:1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칼빈은 이 성경귀절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사람들을 은혜의 양자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로 삼으신다. 이것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Ⅲ.xxii.7).
칼빈은 8-9절에서 암브로스, 오리겐, 제롬의 예지예정을 반론한다. 어거스틴도 한 때는 이 이론에 동조했다고 칼빈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10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대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에 대하여 요약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지예정에 대한 칼빈의 반론은 지금까지의 요약에서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칼빈은 “...외적인 설교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와 신앙에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회개와 신앙의 성령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다”(Ⅲ.xxii10)고 주장한다. 복음의 소리가 많은 사람의 귓전을 때리지만 성령에 의하여 “신앙의 선물”(Ibid)을 받는 사람은 적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심의 보편성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는 선택의 특수성에 해당한다. 씨뿌리는 비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씨뿌리는 행동은 보편적 초대를 의미하고 이 말씀에 대한 신앙의 반응은 선택의 특수성, 곧 성령의 선물을 의미한다(마13:5이하) (Ⅲ.xxii.10).
제23장
예정론에 대한 거짓 고발들에 대한 논박
칼빈은 예정만이 있고 유기는 없다라고 하는 주장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주실 유업을 유기된 자들에게는 주시지 않는다”(Ⅲ.xxii.1)고 한다. 칼빈은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있다고 한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으신 것마다 뽑힐 것이니”(마15:13). 롬9:22-23에서 말하는 멸망하도록 되어있는 진노의 그릇들과 영광을 받도록 되어있는 영광의 그릇들의 대조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은 또한 예정하시는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폭군으로 보는 사람에 반하여 “하나님의 뜻이 모든 되어지는 일들의 원인이요 또한 원인이 되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뜻은 가장 높은 의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원하시든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것은 의롭다”(Ⅲ.xxii.2). 칼빈은 유기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는 철저히 하나님의 의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Ⅲ.xxii.3-4). 인간의 이해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비밀한 뜻(롬 9:19-23; 롬 11:33)이 있다고 칼빈은 잘라 말한다(Ⅲ.xxii.5).
칼빈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의 의지와 허락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타락했으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 자신의 잘못이었다. ...인간은 그의 악한 의도에 의하여 주께로부터 받은 바 순수한 본성을 부패시켰고 그의 타락으로 그의 모든 후손들을 자기와 함께 멸망에 떨어지게 하였다”(Ⅲ.xxii.8)고 말할 때 인간의 범죄까지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허락, 혹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진리는 결코 사탁과 죄악을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책임이 여기에서 도한 함축되어 있다.
끝으로 12-13절은 예정의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함으로 지극히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렵고 떠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를 높이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Ⅲ.xxiii.12).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삶을 지향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엡1: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7),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라”(엡2:10), “창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Ⅲ.xxiii.13). 롬8:29은 믿는 자들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피택되었다고 한다.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확인된다.
유기된 자들의 멸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이다.
1-5절은 피택자들의 효과적 소명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로의 합체(合?)에 관하여 논한다.
칼빈은 롬8:30을 인용한다. 즉, “미리 예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도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특히 칼빈은 이 “부르심”을 “설교”와 연결시킨다.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실효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해야 한다(Ⅲ.xxiv.1). 이 설교를 통하여 양자의 성령을 받게 되며(롬8:15) 영생의 약속을 확약 받으며 영생의 기업을 보증 받는다(엡1:13-14;고후1:22;5:5).
그리고 이 땡 돌같이 굳은 인간의 마음이 녹아지고 죄악의 마음이 변혁되어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며 멸망의 자식이 영생의 자식으로 변한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은 말씀설교와 성령으로 말미암는 소명, 구원, 성화, 회개, 기도 같은 현재적 경험을 통하여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선포하신다(사65:1)
여기에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거부한다. 이 거부의 이유에 대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저들에게 성령의 효율적 역사를 일으키시지 않으신다. 이 내적인 부르심이야말로 우리를 속이지 않는 구원의 보증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줄 안다' (요일3:24;4:13)"고 하였다(Ⅲ.xxiv.2).
물론 신앙이란 설교의 부름을 통한 성령의 선물인 바 이 신앙은 예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복음을 수용했다”고 하는 신앙이 예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Ⅲ.xxiv.3). 신앙은 초월적 근거를 갖는다.
결국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예정은 구원의 경험에서 확증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하며 칭의를 얻고 회개하고 성화 하는 경험이 곧 선택의 경험이다. 이 구원이 일어나는 것은 설교말씀(특히 복음!)과 성령역사를 통하여 일어난다. 칼빈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자비와 사랑의 심정을 찾으려면 우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마:3:17).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원천이시오 구원이 닻이요, 하늘나라의 유업이기 때문에 구원과 생명과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야 한다.”(Ⅲ.xxiv.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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