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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화되어가는 한국 반미, 반일은 공산화의 지름길!

오늘도기쁘게 |

2009-02-07 03:27:16 |

조회: 189

반미, 반일은 공산화의 지름길! * 


 


자유 월남은 1975년에 패망(공산화) 했습니다.


 

망한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난무했습니다. 민족주의에 세뇌당한 종교지도자, 학생들이 연일 반미시위를 했습니다. 미국도 지쳤습니다. 1973년, 드디어 월맹이 제안한 <평화협정>에 속아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철수했습니다. 

미군이 나간후 1975년 4월, 월남이 순식간에 점령됐습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다해서 흑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사이공, 제2의 파리라고 불리던 사이공 항구도시가 야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치품들이 있던 자리에 피와 파편이 즐비했습니다. 총끝 앞에서 목숨을 구하는 자들의 아우성이 타이타닉호의 최후처럼 처절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국민이 당하는 최후였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돕지 않는 자를 외면한 것입니다. 

*월남 정부에는 간첩이 많았습니다. 간첩들은 민족주의자와 인도주의자로 위장했습니다.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수천만 민족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죽고, 갇히고, 신음하고, 도망 한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1967년 9월 3일,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습니다. 티우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패망 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 간첩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의 이 말이 월남 학생들에게 그릇된 민족주의(올바른 민족주의가 아니라)와 반미를 부채질하고 미국에 반전 여론을 자극했습니다. 여론에 밀린 미국은 월맹과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했습니다. 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쪽에서는 대남공작으로 집요하게 공산화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5년간을 끌어오던 베트남전이 종식됐습니다.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종이조각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건 거짓 문서였습니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 위원단을 만들었습니다.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습니다.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습니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 소련, 프랑스, 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습니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습니다.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이로써 세계의 공기는 전쟁에서 평화로 옮겨지는 듯 보였습니다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노벨평 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세계는 이를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더욱 신뢰했습니다. 모두가 환상이었습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월맹은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월맹에 자유월남이 장악된 것입니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들에 망하고, 극성맞은 시위에 망하고, 부정 부패에 망했습니다.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에는 수많은 땅굴이 있었고, 그 땅굴 속에는 혁명정부 청사까지 들어서 있었습니다. 월남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내용이 단 하루만에 여기에 보고됐습니다. 


티우가 공산 프락치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하여 많은 정치인 관료들이 간첩이었습니다. 이는 망한 다음에야 드러난 사실들입니다. 

정보기관에 가장 많은 간첩이 들어 차 있었습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습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 경제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이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평화무드에 들떠 있었습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됐습니다. 1975년 9월에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습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 혼란과 어우러졌습니다. 국민의 사기가 떨어지고 계층간 갈등이 증폭됐습니다. 좌익들의 활동공간이 점점 더 넓어진 것입니다. 일선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일반국민들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 군대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제가 체포되기 직전 사이공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했으며, 속옷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발에다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군대를 붕괴시킨 것입니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 것입니다. 좌익이 시민단체, 종교단체를 장악했습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구국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습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켰습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습니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반미 시위를 벌였습니다. 

월남은 군사력으로 망한 게 아니라 이들 좌익 단체의 선전-선동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입니다. 암살과 각종의 압력들이 사회적 공포감을 확산시켰습니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고 그들의 친척들이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이 침묵했습니다. 1974년 10월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해지고 안일해졌습니다. 티우 대통령까지도 58만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에 도취돼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1월 8일 드디어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이 월남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습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탱크부대가 독립궁을 점령했습니다. 5명의 월남 장군들이 자결하고 나머지는 외국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수용소에 연행됐습니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습니다. 월남군 부대시설을 개조한 것입니다. 한번 가면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좌파였던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만에 이르는 이들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 끌려가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109만여명의 난민이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이 되었습니다 

결 론 

1. 미군의 입장: 스스로 애국하지 않는 국민을 위해 우리가 왜 피를 흘려야 하는가? 

2. 월남병사의 입장: 저런 부패한 정권을 위해 우리가 왜 죽어야 하나? 

3. 오늘의 우리 사회현상과 너무나 닮았다. 

4. 적을 의심하기를 싫어하며 안일하게 자기만 지키려 했던 사람들은 냄새나는 감옥 
    에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아기들까지도 같이 죽였다. 

5. 테러, 압력, 압박에 몸조심하며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은 무식한 공산집단에 의해 
    찔러 죽임을 당했다. 

6. 집권 공산당은 반정부 데모, 적과 내통했던 월남내 좌익 세력도 한번 배반자는 
    영원한 배반자라며 예외없이 죽였다.
 

(전 주월공사 이대용님의 글 중 발췌)

 





공산화된 월남, 청년들의 월남탈출! 
http://www.chosun.com/international/news/ 


베트남 청년들 “홍콩 감옥 가자”줄서 





병 고쳐주고 복역수당까지 不法입국 관광상품 인기

홍콩=송의달특파원 edsong@chosun.com 
입력 : 2004.10.27 18:42 35'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베트남 청년들 사이에 ‘홍콩 감옥행’ 패키지 관광상품이 화제다. 이 상품은, 권총·칼 등을 소지하고 홍콩으로 불법입국하다가 적발될 경우, 홍콩 감옥에서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노린 신종 수법. 

홍콩 지방법원은 지난 26일 홍콩 교도소에 입소하기 위해 불법입국한 베트남 청년 반 히엔 응우옌(21)에 대해 징역 21개월을 선고했다. 히엔은 이날 법정에서 베트남으로 송환하지 말고 홍콩 감옥으로 보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었다. 


인기의 배경은, 하루 세끼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매달 400홍콩달러(6만원)의 복역수당을 받고, 무료로 각종 병까지 고칠 수 있기 때문. 최근 두 달 동안 홍콩 교도소 입소를 목표로 불법입국한 세 명의 베트남 청년이 홍콩 법원에서 최고 2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특히 베트남의 조직폭력배들은 1500홍콩달러의 수수료를 받고 베트남 청년들을 대상으로 불법입국 알선 관광상품 판매에 나서 홍콩 정부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 홍콩 언론들은 “홍콩이 불법체류자의 낙원이 되지 않으려면 권총 두 자루와 칼 등을 갖고 불법입국하는 외국인들에게 장기 징역형을 내리는 기존 법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화!..그 후 30년.. 베트남의 인권탄압 인간 생지옥!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 


베트남의 인권 탄압


존 E 캐어리 美 폴스 교회 국제상담역 

공산 베트남은 1975년에 끝난 전쟁에서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에서 죽은 5만8000명의 남녀 미국인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래 전 정글전쟁에 대한 나쁜 기억에 관한 것도 아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의 각종 현실에 관한 것이다. 즉 30년에 걸쳐 공산 베트남 정권이 언론·종교·출판의 자유 혹은 관용, 모든 종류의 개방을 소중히 생각하는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온 탄압, 투옥, 인권침해, 고문의 기록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베트남에 관해 듣는 것이 많지 않다. 베트남은 미사일을 보유하지 않았고 역내 이웃 국가들에 뚜렷한 위협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 지도자들은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며, 이로 인해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특수한 범주에 자신들을 위치시키고 있다. 

사이공이 1975년 공산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새 정부는 30년에 걸친 증오, 고통, 인간 파괴를 시작했다. 수백만 주민이 ‘재교육’ 수용소에 보내졌다. 이를 자세히 보았다면 대다수 미국인은 이러한 수용소를 강제노동수용소라고 불렀을 것이다. 

전후 베트남에서 구금된 사람에게는 재판과 판결, 가석방 가능성이 허용되지 않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사회 복귀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을 때까지 수감 생할을 계속했다. 불운한 사람들은 그냥 행방불명되었다. 

지금은 미국 시민이 된 한 베트남 이민자는 자기 남동생이 수용소에서 ‘제거’당했다고 최근 필자에게 말했다. 그는 분명한 과오 때문에 살해됐다. 그는 10대 때 공산당 통치에 분노한 학생운동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호찌민시)에 도착했을 때 전례없는 규모의 종교적인 탄압 또한 뒤따랐다. 가톨릭 교회의 호찌민 주교 응우옌 반 투언은 공산당 교도소에 13년 동안 수감되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후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강압에 못이겨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거나 추가로 투옥되는 고통을 겪었다. 반 투언 주교는 지금도 계속되는 종교적 관용 부재와 탄압의 상징이다. 보다 최근에 그와 교대한 응우옌 반 리 신부는 2001년 이후 공산당의 감옥에 수감돼 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2005년도 세계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미 심각한 상태인 베트남의 인권 상황은 2004년에 악화되었다. 정부는 국민의 공산당 비판이나 다원주의, 민주주의,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발언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반체제 인사들은 박해를 당하고 고립되며 가택연금을 당하고 많은 경우 범죄 혐의로 기소되고 투옥된다. 박해 대상으로 뽑힌 사람들 가운데는 저명한 지식인들 작가들 공산당 열성당원 출신들이 포함된다.” 

유엔과 다수의 다른 국제단체는 베트남의 인권상황을 비난하고 있다.
 

    역주=오성환 외신전문위원 suhwo@segye.com 

    2005.06.26 (일)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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