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교회

전체메뉴보기 검색
통합검색 검색

교회소식

베스트

목록보기

썬다 싱의 명상(1)

겸손 |

2005-09-09 00:00:00 |

조회: 249

< 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명상 1>

 

1. 성령을 받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전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랐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위대함과 신성은 이해할 수 없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3년 간을 생활했다.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했으나 그리스도가 죽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자 엄청난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지금시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의 능력과 신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가 많다. 이는 회개와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2. 교만하게 되면 절로 자기도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멸망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남보다 진보하였다 할지라도 다이아몬드가 석탄과 같은 원소로부터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값비싸다 해도 석탄과 같이 완전히 타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3. 우리가 절벽 위에서 밑을 볼 때는 현기증을 느끼지만 하늘을 쳐다볼 때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위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밑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발견하고 마음이 안온하지만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릴 때는 실재로부터 떨어져 내려가 산산이 부서질 위험이 있다.

 

4. 참된 시간 즉 실재와의 관계에 있는 시간 그것은 영원이다. 세상의 시간은 참된 시간이 지나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모두가 현재이기 때문이다.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신 실재자 앞에는 과거나 미래가 함께 그 앞에 서있다. 그러나 우리 감각에 있어서 현재는 존재치 않고 그저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모든 순간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미래에서 과거로 옮아간다. (실재자는 변화를 모르나 피조물은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고 하나 사실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지나가는 정점인 현재는 우리에게 잡히지 않으므로 인식되지 않고 과거나 미래도 또한 우리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제에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 잠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오랜 시간을 지낸 것처럼 느껴지며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에도 슬픔과 고통 중에는 하루는 1년과 같이 여겨지며 기쁨 속에서는 1년은 하루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은 이처럼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에 있어서는 모든 경우가 참된 현실이다. 우리는 영원한 실재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시간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실재는 시간이나 거리가 아니고 상태의 변화일 뿐이다.

 

5. 시간은 공간에서 생긴 일이나 사물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이것을 공간 속에 내어놓을 때 생기는 상태의 변화가 시간을 만들어낸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이 실재다. 변화가 끝났을 때 그것은 과거다. 변화가 일어나려고 할 때 그것은 미래다. 사물이 변화할 때에 시간도 또한 그것과 더불어 미래나 과거 속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실재는 그 자신에 있어서나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영원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일이 없다. 시간은 변화하고 망각 속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속에서 행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 속에 흘러들어 간다.

 

6.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는 이 세상의 철학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참된 기독자의 생활과 경험에 의해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 신에 의해 만들어진 자며 그 자녀이지만 양쪽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쪽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며 이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서 그의 모습을 닮아 동화되고 생명과 영원의 축복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불신자는 무지한 까닭에 진리의 암영 속을 걸으며 자기의 의지가 요구하는 것만 좇아 참된 것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끊고 산다.

 

7.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그 종교적 성정의 요구를 채우기까지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 깨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하여도 그 평안을 얻으려는 강력한 욕구를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마음의 요구를 죽이며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한 자는 어느 정도 평안한 듯 하나 그것은 죽은 평화이다. 평화를 구하는 영혼의 욕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8. 선다싱은 예수를 알기 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어느 날 주 예수께서 일순간에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으며 불안한 영혼에 참된 평화를 주시어 많은 사람이 자기 몸을 괴롭게 하면서 까지 얻으려 하다가 실패한 그 평안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세상의 논리를 초월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혜이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여 고행으로 육체의 요구를 억제하려는 것은 그 마음은 가상하나 그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필요한 때는 은혜로 얻은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육신을 훈련시키는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다.

 

9. 인도의 영적 지도자인 ‘간디’ 조차도 고백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오직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실 뿐이기에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알 수 있는 분이다. 간디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러나 그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끊임없는 고민이라고 어느 날 고백하였다.

 

10. 어느 구도자는 동굴에 영원히 유폐하여 산다. 그는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사는 동기는 무엇을 얻고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제 모든 요구를 오히려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즉 괴로움이든 평화이든 그 모든 것의 느낌과 요구의 멸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이 종말이 올 줄 모르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제 부족함 곧 미완성의 부분은 재생할 때 전해져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요구와 감각의 기능을 가지고 출생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요구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을 없이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그는 그런 것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자살이다.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대신 평화를 얻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얻으려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화가 없는 상태로 우리 스스로가 처해진 상황일 뿐이다.

또 만약 요구를 버리려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요구를 죽이려는 자체가 벌써 하나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좋은 요구는 말살시키는 것보다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참으로 나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요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11. 어느 기독교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보통 신자가 갈 수 없는 곳에 더욱 그러하다. 요한도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을 따르지 않기에 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하셨다.

 

12. 세상에는 드러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비록 대중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나 자신들끼리는 고백을 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게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은밀히 해야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몸을 보면 각 기관들이 있어 서로 한 몸을 위해 각자가 맡은 일이 다르다. 크리스천은 모두 소금과 누룩이어서 소리 없이 다른 것에 맛을 내고 불게 만든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 부르셨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에 소리나지 않게 해야 고기가 도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일을 위해 소리 없이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13. 두 설교자가 설교하러 시장에 나아갔다. 먼저 설교한 자는 현명하고 웅변도 좋았다. 그가 말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이 질문하였다. 설교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대답하였으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옆의 다른 설교자에게 눈길을 돌려 그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다른 설교자가 일어서 대답을 하려하자 그 질문자가 막으며 정중한 경의를 표하며 군중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나는 이 분에게는 질문할 것이 없다. 그것은 내가 그의 생활을 알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통해 구원의 도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설교자에게서는 이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입으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난 그 웅변가는 조용히 돌아가 회개하여 그 후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자가 되었다.

 

14. 구하는 자는 찾아내며 찾아낸 자는 다시 그 이상을 구하는 법이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를 찾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을 이미 찾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재에 대한 지각을 이미 주셨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계시지만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주의하여 하나님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이 날아다닐지라도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15. 우리는 주님을 왜 믿는가. 우리가 헤어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있을 때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주었기 때문인가 아니 이보다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주님은 참된 우리의 구주시며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16.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기 전에 새로운 피조물로 고쳐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죄에 더럽혀지고 타락한 낡은 인생은 그를 알 능력을 갖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를 알기 전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질이 우리의 것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그를 참된 하나님으로 알게된다.

 

17. 인간은 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죽은 것이다. 마치 공기를 보지 못하듯 그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자는 공기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호흡도 하지 않고 감각도 없듯이 죄로 죽은 자도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기도의 호흡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담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을 때 그는 생령이 되었으나 죄로 그 생명은 죽었기에 주님이 다시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야 할 필요가 생겼다.

 

18. 우리가 태양을 보려면 태양 자체에서 나온 빛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보는데도 그냥은 볼 수 없고 주님에게서 비쳐지는 영적 빛의 조명을 받아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려면 영적인 시력이 열려야 한다. 부엉이와 박쥐가 눈은 있어도 낮에 비추이는 태양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않아 볼 수 없듯이 장님과 영의 눈먼 자도 보려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19.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영적인 지식은 이 세상의 지식과 다르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과는 다르게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직관으로 더욱 환하게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지식은 때때로 어리석은 이야기가 되어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하고 거기에 기교를 섞어 오히려 사람들을 어리석게 한다.

 

20.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만의 경험을 많이 해야한다. 또 참된 영적 지식은 오직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만 온다. 하나님은 마음의 은밀한 골방에서만 사람과 이야기하시며 우리는 거기서 조용하고 잔잔한 소리를 듣는다. 이런 때 그의 자녀에게는 숨기지 않고 계시하신다. 이 세상 지식은 귀납법에 의하여 얻을 수 있고 영적 지식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직관(논리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에 의하여 얻는다.

 

21. 해는 그 빛과 열로 수목의 성장을 돕지만 만약 나무에 병이나 결함이 있으면 같은 빛과 열은 오히려 그 나무를 죽인다. 이것은 태양의 잘못이 아니고 나무 자체의 상태에 따른 것이다. 그처럼 사랑의 하나님이요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도 인간의 영적 발달을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 자신의 성질에 따라 생명 주는 빛을 변하게 하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과 같게 만든 인간을 상하게 할 자는 인간 자신밖에 없다.

 

22. 하나님 없이 인간이 생활한다는 것은 벌써 그의 영적 지각과 감각이 둔해지도록 자신을 손상시켰다는 말이요 이때부터 남도 손상시킨다. 내 영적 감각이 죽으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23. 우리의 내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사물이나 장소는 이 세상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욕구는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과 그 욕구를 만드신 자에게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재산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왕궁에 살지라도 행복이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비록 빈곤과 곤란과 고뇌 속에서 가지는 것만큼의 행복과 평화를 가지지 못한다.

 

24. 물질의 특별한 용도는 우리의 영혼의 집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쓰이는데 있다. 만약 그 용법에 적당한 용도를 넘어서면 영혼을 제 2의 위치에 놓고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25. 많은 사람들이 그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있으나 모두가 좋아서 지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어서 짊어지고 있는 것이며 이는 구레네 시몬이 진 것과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26.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승천할 때는 자기 있는 곳에 모든 사람을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은 마치 자석과 같이 속에 끌리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다. 주님의 요구는 그가 있는 곳에 그를 섬기는 자도 있게 하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골고다 주님의 좌우에 선 강도들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한 편은 주님을 시인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천국에 들어가지만 다른 편은 회개하지 않고 도움도 구하지 않아 멸망으로 간다. 이 강도들의 모습이 바로 세상의 양편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운명이다.

 

27. 물이 가득 있는 통 속에 컵이 담겨져 있고 그 컵 속에 또 물이 담겨있다면 물과 컵 중 어떤 편이 어떤 편 속에 있는 것인가. 이 관계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이다. 컵은 엎드려져도 자빠져도 통 속의 물 안에만 있다면 컵 속의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 안에 살며 주님도 우리 안에 사신다. 또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28.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은총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게 될 수 있다. 구원도 우리가 현재 온전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얻은 후 그 토대에 서서 드디어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육체, 무능력한 허약의 육체, 이미 죄에 의해 썩을 대로 썩은 육체 속에 유폐되어 있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에는 매일 많은 먼지가 끼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 목욕을 하면 그것은 우리를 손상치 못한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약점이 무수할지라도 생명의 생명이요 영의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해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완전을 위한 싹을 가지고 있으며 장차의 완전은 이 위에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녀로서의 모습으로까지 우리를 끌어올리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이르러 우리를 더욱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29. 위험은 항상 창조자에게 받쳐야할 마음을 피조물에 두기 때문에 생긴다.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사물 속에서 창조주의 뜻을 찾고 그에 모두를 맡기고 신뢰할 때 평화가 오고 이를 어길 때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신과 무엇인가 어긋났다는 표시이고 평화는 신과 조화한다는 표시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물과 같아 인간이 그 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또한 그 물 속에 빠져도 죽게 된다. 이처럼 은총으로 주어지는 물과 같이 삶의 주류로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이지만 이것들에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욱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오히려 독으로 변해 우리를 죽인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불안의 끝이 보이고 평화가 온다. 이 하나님은 예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 내어주며 희생을 기쁨으로 여기며 낮아지고 겸손하며... 그분의 생애는 이와 같았다. 그분은 이러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존경받고 사랑 받고 자기를 높이며 모든 것을 가짐으로 평화를 누리려 한다.

 

30.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세계 속에 살기에 그들을 필요로 할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진정한 목적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 가운데 배가 있을지라도 그 목적은 물을 싣는데 있지 않고 배를 물 가운데 띄운 자의 의중에 있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인생은 보이는 것만 그 마음에 퍼담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31.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위에 표현하셨다. 그리하여 산이 있고 바다 꽃과 나무 이름 모를 새 여러 생물 하늘 구름 인간 등 보이는 것과 이 모두를 보호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셨다. 그리고 생기를 넣어 그 모든 것이 실제 살아나도록 하셨다. 이중에 인간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고 지켜줄 수 있도록 더한 뛰어난 색채와 부드러움으로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돌보고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빼앗고 누리는 자의 위치로 자신을 스스로 올려놓았고 모든 것의 혀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때 그의 혀는 침묵의 혀가 되었다.

 

32.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난다 면 자신도 바울처럼 변하리라 생각하지 말라. 인간의 속을 아시는 분은 인간 자신도 아니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단지 인간 개개인의 여러 조건에 알맞게 그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신다.

 

33. 때때로 우리의 염원과 요구의 밑바닥에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난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사는 자만이 이 소리를 용이하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의 종의 생애를 통해 세상에 빛나듯 성령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그릇으로 성화된 생명을 쓰시듯 인간의 영혼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두뇌처럼 아주 미묘한 기계를 쓴다.

 

34. 그리스도의 종은 달처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세상에 비춰준다. 또 달은 때로 세상과 태양 사이에 와서 일식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주의 종이면서 옳은 삶을 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빛을 가리는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그 빛을 인식하고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다.

 

35.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장님이 점자로 된 성경을 읽으려 손을 움직였으나 손가락 끝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화로 있는 데로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느끼고 알기 전에 이미 죽은 우리의 내적 감각이 새로운 생명으로 각성될 필요가 있다. 기도와 명상 중에 하나님의 불인 성령께서 우리의 얼어붙은 내적 감각을 따뜻이 한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듣고 볼 수 있다.

 

3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지식이나 말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식이나 말은 외부적인 것이나 영의 말씀은 내부를 여는 것으로 이는 마치 어린이들이 쉽게 모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다.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말이나 지식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벙어리인 헬렌켈러는 인간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전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37. 이 세상에는 밤이 불과 몇 시간 밖에 없는 곳과 몇 달 계속되는 곳이 있다. 그처럼 우리 생애에는 슬픈 때와 기쁜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필연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생애에 있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은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살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겨울에 잎사귀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 잎이 피어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박해를 받고 자신을 낮출 때면 죽은 자처럼 보이나 그 후 몇 번이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 속에 있음에도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워 있는 것이다.

 

38.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곤란 속에 허우적거려 쓰러지기를 수 없이 하여도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통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고통은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가냘픈 것처럼 보이는 기쁨이 솟아나며 그 엄청난 고통을 이기게 된다. 이는 고통이 끝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지난 다음에 기쁨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도 아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의 이치로는 측량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이 세상의 기쁨과 같은 성질이라면 누가 그 기쁨을 흉내내보기도 하련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은 신비로워 세상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주신 짐은 그 외적인 모습이 너무나 엄청나고 혹독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참모습은 가벼우며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을 증거 하였다. 참된 평화가 오는 것은 그들의 어깨에 그리스도의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을 때이지 그 짐이 벗겨졌을 때가 아니다. 세상은 이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하지도 못하니 믿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술에 취해서 슬픔을 잊으려 하며 또 잠깐 사이의 흥분과 기쁨을 취하려 한다. 물론 그것도 기쁨임에는 틀림없으나 모든 사물을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우월하고 오래 계속되리라는 점에는 충분한 음미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기쁨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다시는 귀중한 시간을 피조물 가운데 있는 잠시동안의 기교적인 쾌락을 찾기 위해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39.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일한 한 신자가 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 남을 돕던 자신이 오히려 남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과 더 이상 주님을 향하여 봉사할 수 없음을 슬프게 여기며 기도로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각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삶은 그가 건강할 때보다 더 많은 감화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자리에서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는 꽃처럼 누워있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맑고 아름다운 생의 환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갔다.

이 조용한 감화력이 주위에 퍼져 많은 불신자들이 그의 삶 속에는 어떤 깊고 진한 진실이 있을 것이라 여겨 그에 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그들도 점차 그의 신앙의 진실을 발견하고 감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설교와 철학적인 논증과 이론을 들었으나 그의 삶 속에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생애를 보고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감화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이 필요했다면 건강을 주었을 것이나 현재와 같은 정도의 영향은 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봉사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자리는 슬픔과 절망의 자리가 아니고 많은 사람을 향하여 지고있는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40. 선다싱은 보통 시크족이라 불리 우는 집에 태어나 인도교의 가르침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를 신봉하는 산 모범이요 충실한 대표자였다. 어머니는 매일 일어나 목욕한 후 ‘바가밧트 기타’와 다른 인도 경전을 읽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그 순결한 생활과 교훈에 감동되었다. 아침에 행할 제 일의 의무는 먼저 영적인 양식과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야 비로소 조반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음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때로 이를 어길 때는 어머니는 사랑으로 또는 벌을 주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그 뒤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새겨 주었다. 그 시절에는 그가 아직 어려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 뒤 깨닫게 되었다. 그가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심어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은 가장 좋은 신학교였다.

후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한 인도 철학가와 시크족의 사두에게 맡기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그는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해 이에 대한 갈구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영혼이 허덕이며 구하는 진리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야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는 한 밤중까지 경전을 읽을 때가 보통이었다. 영혼의 평화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는 그를 즐겁게 할만한 많은 것들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의 고민은 새롭고 이상한 것이다. 그 고통은 그가 좀더 성장하여 영적 생활에 대해 보다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 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충고를 그는 들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기를 어린이가 당장 빵이 없어 굶주리거나 물이 없어 고통 할 때 커서야 비로소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어린이에게 무슨 도움이 있을까 반문하였다. 그들은 또 이 같은 영적인 깊은 진리는 하루아침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급히 굴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어린 그가 아는 작은 지식이 그만큼의 갈증과 욕구를 일으키는데 커서 그 지식을 알수록 점점 그의 갈증과 욕구는 더하게 만들 것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영혼의 갈증과 굶주림을 해소할 영적인 물과 빵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두는 그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경전을 통해서 이제껏 네가 지닌 것이 불완전한 유한의 지식 때문이며 계속 정진하여 완전한 지식을 얻는다면 그때 이 욕구라든가 염원이 단순한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네 자신이 신의 일부분이므로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무런 욕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신이거나 신의 일부라면 그에게는 당연 어떠한 미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미망이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이 미망에 종속되고 미망이 신보다 강하여 미망이 실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는 인생의 심한 비애를 느끼고 어느 날 새벽 세시에 일어나 만약 하나님이(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님) 계시다면 자신에 나타나 구원의 길을 나타내 주기를 기도하고 이 응답이 없다면 날이 밝기 전에 철길에 나가

다음글 종말의 수확에 참여하라 /케네쓰 코플랜드 묘지니 2005-09-10 00:00:00
이전글 그의 길을 예비하라! [4부.조정의 영에서 진정한 영적권위로의 변화] - 릭 조이너 - Joseph 2005-08-19 00:00:00

공유하기 닫기

url로 공유시 전체 선택하여 복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