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yes |
2010-03-13 00:00:00 |
조회: 67
형제들의 참소자 - 빗나간 기독교 언론 방송 매체들
미국 언론계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형제들의 고소자”의 주요 발판의 하나가 되었고 미국에서의 영적 진보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은 세상의 언론계를 넘어서서 많은 수의 기독교 언론 매체들까지 포함하기에 이르렀고 그런 기독교 매체들은 때로는 그 보도에 있어서 세속 언론들보다 덜 존중할만 하고 덜 진실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기독교 방송 매체들의 기본 정책들 중 많은 것들이 성경적인 원리보다는 인문주의적 언론 철학에 더욱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방송 매체는 서방 교회 안에 뿌려지고 있는 파괴의 독의 - 즉 불의한 심판의 정신 - 가장 큰 근원지들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순수한 형태의 회의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그를 가장 훌륭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예는 바울과 바나바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찾아보았던 베뢰아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 행 17:11)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회의론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장 나쁜 것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더 크게 보일 수 있고 혹은 최소한 자기 자신의 결점들에 대해 더 나은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의심은 가장 비극적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 이 세상의 연대기가 읽혀질 때에 우리는 이 악한 의심이 암이나 에이즈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위대한 영혼들은 다른 이들을 더 높이 올림을 통해서 자신들이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갑니다.
1960년대 이후로 기독교 방송매체를 포함한 서방의 뉴스 배체들은 이 회의론의 가장 어두운 측면에 의해 거의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기독교 언론이 교회, 스포츠 혹은 어떤 사건에 대해 기사를 쓰면서 어느 정도 명예를 떨어뜨리는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 내용은 종종 다른 사람의 말을 간접 인용한 것이고 때로는 심지어 가장 천박한 형태의 잡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명예 훼손의 표적이 되는 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실수하지 말기 바랍니다. 험담을 옮기는 자는 험담을 처음 만들어 낸 자와 똑같은 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대개 정보 전달이라는 가면을 쓰거나 사람들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려는 노력이 노력이라는 구실 하에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가장 심각한 오류들 중 하나에 참여하고 있다면 우리가 정말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 자신을 심판자로 높이고 있는 자들은 거치는 돌(방해물)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범한 혹은 형편없는 지도자들을 그냥 보아 넘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가에 대해 아주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들에서 떠날 때에 우리는 자신들이 심판하고 있는 자들보다 더 심각한 궁극적인 심판을 받게 될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언론인들이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교훈에서 떠난 것에 대해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덕을 세운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비판은 세우려는 의도를 가진 것입니까? 아니면 다만 무너뜨리는 것입니까?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우리를 끔찍한 죄에서 보호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5-17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거치는 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절차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특히 언론계가 이 절차를 다르지 않음으로써 교회에 끼친 손해는 우리가 밝혀내려 노력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끼친 손해보다 컸습니다. 야고보서 3:13-18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글을 쓴다는 것은 성경적 사역의 한 측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언론인들은 교사들이나 목사들과 같은 분명한 영적 사역들을 겸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성경적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상당한 기간 동안 신실함과 지혜를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장로들로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을 바로 잡기 위한 성경적 절차들을 바르게 따른다는 것은 장로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 절차를 제대로 따르지 못할 경우 그들은 거치는 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임명한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서도....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라고 경고합니다. 널리 알려진 비판적 영의 출처이면서 지금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 오고 있는 많은 이들은 진정한 기름부음 위에 서 있다기보다는 세속적인 영향력의 발판 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문주의적 언론 철학 위에 세워진 학교의 전문적 훈련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얻어냈습니다. 이 철학은 지혜와 진리에 대한 진정한 추구의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진리이신 그분 자신과는 충돌합니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위임을 받았지만 세상의 영에게 굴복해 버렸습니다. 세속 학교들은 우리에게 작문의 기계적인 부분들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수해 주는 철학은 기독교 매체들에게는 파괴적인 것입니다. ... 우리가 의와 거룩함 그리고 진리 안에서 창조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자아를 입어야 하고 세상의 철학과는 다른 철학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자 후원자가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의 정확성은 세속 언론보다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보다 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목격했던 사건들 혹은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 언론인들의 탐구 기사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부정직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너무나 가십, 간접적으로 주워들은 얘기, 그리고 추측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수퍼마켓에서 파는 싸구려 주간지와 경쟁이 될 지경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상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가 타협의 대상이 되는 것을 계속 허용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우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들은 어떤 기준에 입각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까? 누가 그들에게 교회를 바로 잡을 권위를 부여했습니까?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요즘 세속 언론 매체들이 대중의 의견을 조작하고 투표로 뽑힌 공직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중 정책을 지시할 수 있듯이 기독교 언론인들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이런 힘을 주었습니까? 이것은 글을 잘 쓰는 능력에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위임에서 온 것입니까? 단지 잡지, 회보, 혹은 프로그램들을 시장에 배포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우리들 중 누가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까? .... 기독교 언론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는 가십(gossip)이라고 부르시며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산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 경고를 어떤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귀에는 아직도 그 말씀이 쟁쟁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되지 말라”(약 3:1)고 경고합니다. 주님 자신의 집에 대해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은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영향력을 얻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하도록 합시다. 바울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감히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후 10:14-18) 우리들 모두는 권위의 영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넘어선다면 우리는 우리를 ‘그 길(the way)'에 머물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넘어서는 위험을 맞게 될 것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기독교 텔레비전 사역은 강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텔레비전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신뢰와 평가는 그 어떤 다른 전분가 그룹에 대한 평가보다도 더 낮아져 버렸습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언론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언론의 불경건한 기초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벧전 4:17) 시작됩니다. 기독교 언론은 곧 텔레비전 사역들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잡지, 간행물, 회보, 신문 등에 종사했던 불경건한 회의론자들이 그들이 남들에게 가했던 만큼의 심판을 자신들도 받게 될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정직하고 공평하게 되려고 노력했으나 인문주의적인 토대 위에서 일을 해 왔던 사람들도 그들의 토대들이 붕괴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까? 나는 임박한 심판들은 진정한 회개를 통해 피할 수 있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가 잘못한 것들에 용서를 구하는 것 이상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던 교차로로 돌아가서 다시 올바른 길을 따라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종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을 경우 그것을 배상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에서
출처 :Elijah House Ministries 원문보기▶ 글쓴이 : 오직예수!
다음글 | [스크랩] 참된 예언의 은사와 사탄의 치명적인 공격들 - 릭 조이너 | oh-yes | 2010-03-20 00:00:00 |
---|---|---|---|
이전글 | 릭 워렌 “대형교회와 멀티 사이트 교회는 성경적” | 겸손 | 2010-02-13 00:0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