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고난의 행군'때 사람 잡아먹었다는 소문 사실이었다"
2014.04.03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2/2014040204843.html?csmain
영화 같은 탈출기 '만사일생' 출판한 외교관 탈북자 홍순경씨 인터뷰
1999년 2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1년 8개월간 태국에서 북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북한 외교관 출신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76) 위원장이 3일 ‘만사일생(萬死一生)’이라는 책을 냈다.
홍씨는 이 책에서 방콕주재 북한대사관 무역참사로 있던 자신이 북한 국가보위부의 모함을 받아 북한으로 소환되기 직전 대사관 탈출을 감행, 여러차례 죽을 고비와 북한 송환 위기를 넘긴 끝에 한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을 상세히 공개했다. 또 북한의 해외 공관과 외교관들이 본국에 상납하기 위해 달러ㆍ금괴ㆍ상아ㆍ보석ㆍ술ㆍ 무기, 심지어 바다거북 알까지 밀수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소개했다. 홍씨는 1991~1999년 태국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그 이전 1983~1988년엔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한 베테랑 외교관이었다.
“통일이 5년 안에 온다”고 믿는다는 홍씨는 “내 인생의 작은 이야기들이 통일을 염원하고 소망하는 이들에게 북한을 알리고 독재체제의 본질을 깨우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고(故) 황장엽 선생의 뒤를 이어 북한민주화위원회를 책임지고 있는 홍씨를 2일 만났다.
―당시 탈출 과정이 소설 같았는데 한국에 망명한 직후 자세한 이야기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알다시피 한국에 들어온 2000년은 한국 정부가 북한을 의식해 탈북자들의 입을 막고 있던 시기였다. 국정원에서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중국에 떠도는 탈북자들을 데려가라는 중국 정부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다. 대신 북한 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거의 다 무너져가는 북한 독재정권을 살려놓고 있었으니 나 같은 사람의 증언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황장엽 선생 등 많은 분들이 나보고 책을 내라고 권했지만 당시로서는 책을 낼 수 없었던 거다.”
―북한에서 소환령이 떨어져 탈출을 결심했다고 했는데 소환당하면 처벌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했나.
“1999년 2월 17일이었다. 방콕대사관으로 전문이 왔는데 평양의 국가보위부에서 보낸 것이었다. ‘과학기술 참사 홍순경과 그 아들, 지문인식기술 전문가 4명 등 6명은 재정문건 일체를 갖고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암전(暗電ㆍ암호전문)을 보는 순간 속으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북한 당국은 비교적 선진적인 지문인식기술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베이징과 도쿄, 방콕 3곳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쉽게 말해 지문인식 자물쇠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엔 국가보위부(국정원 격)와 사회안전부(경찰) 간에 항상 알력이 있는데, 당시 보위부원과 안전부원들이 해외 출장을 갔다가 금전 분배 문제로 마찰이 생겼다. 이 때문에 보위부가 안전부를 보복하기로 했고 당시 안전부가 주관하고 있던 지문인식기술 개발을 타겟으로 삼았다. 안전부 방일 대표단이 지문인식기술을 팔아먹으려 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가 소환 암전을 받았을 무렵에 지문인식기술을 다루던 베이징 지사의 지사장과 직원들이 6개월 전 모두 소환돼 처벌된 상태였다. 이번에 방콕 차례라고 나는 확신했고 소환돼 북한에 들어가면 고문 등을 당해 몇 달 못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소환 당일 새벽에 차를 몰고 부인ㆍ아들과 함께 대사관을 탈출했다가 10여일 만에 다시 북한에서 파견된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대사관의 일제(日製) 미니버스에 실려 라오스 국경으로 끌려가던 중이었다. 난 당시 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나를 가운데 앉히는 바람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난 그때 진심으로 자살을 갈망했다.
그런데 잘 달리던 버스가 뒤집어진 것이다. 아내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에 실려갔다가 가위로 배를 찌르는 등 2번의 자살 시도를 하고 나서 태국 경찰이 와 우리는 구해주었다. 이후 태국정부와 북한당국이 우리의 신병처리를 놓고 지루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바람에 난민보호소에 1년 8개월이나 갇혀 있다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북한 송환을 피하고 한국으로 오게 되는 과정에서 추안 리크파이 태국 총리와 현지 경찰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국정부에서 탈북자들을 홀대하는 바람에 한국이 아닌 제 3국행을 희망한 탈북자들이 많았는데.
“나도 고민을 많이 했다. 미국과 노르웨이 등을 고려하다가 황장엽 선생이 보내준 편지 한 통에 마음이 움직였다. 태국 난민보호소에 있을 때 황 선생이 한국대사관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우리 말에 구사일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홍 선생의 경우는 ‘만사일생’이라 할 만하오. 수년 전 태국에서 홍 선생과 만났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소. 하루빨리 홍 선생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나와 함께 손잡고 통일운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라오’라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외교관 생활은 어땠나.
“외교관은 외화벌이가 주된 책무다. 대사관 경비도 자체 조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평양에 ‘충성자금’도 바쳐야 한다. 달러 밀반출을 예로 들면 거기에도 독특한 노하우가 있다. 먼저 엑스레이를 통과할 수 있도록 달러를 포장을 한 뒤 다시 달력 종이와 검정색 종이, 시멘트 종이로 3번을 싼다. 이것에 외교문서용 도장을 찍어 외교행랑에 넣은 뒤 세관에서 외교관 여권을 보여주며 통과하는 식이다.
북한에서 나오는 각종 대표단들의 물품 구매 요청에 응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웠다. 안경 사달라, 약 사달라 등등 온갖 물건을 다 요구했다. 당시 태국 대사관의 서기관 월급이 280달러가 채 안됐다. 대사관 직원 부인들은 백화점 쇼핑은 엄두도 못냈고 싸구려 시장만 찾아다녔다. 그래도 북한에서 외교관으로 외국에 나간다면 모두가 부러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간첩이 큰소리치고 다니는 한국의 상황이 걱정스럽다는 홍순경씨./이명원 기자
―1990년대 중후반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 상황도 책에 묘사돼 있는데.
“책에 썼듯이 1997년 평양에 잠깐 들어갔다가 사회안전부 참모장이 지방과 통화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자살자 몇 명? 사람 잡아먹은 범죄자 몇 명? 살인자 몇 명? 아사자 몇 명?…” 그런 식의 대화였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5년 안에 통일될 것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전망하는가.
”장성택 사건의 영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금과 같은 북한체제는 오래 존속할 수가 없다. 중국도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바뀌고 있지 않나. 북한 경제난도 심각하고 주민들 사이에 김정은에 대한 존경심도 없다. 이전에 정부가 배급을 해줬기 때문에 주민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정부에 복종했지만 이제는 배급도 없어졌고 시장이 그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독재 정권의 내부 통제가 제대로 먹히겠는가. 북한은 조만간 3대 세습 독재와 단절하는 획기적인 개혁개방이 있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고 본다.”
―남북통일로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이 있다고 보는가.
“체제 경쟁에선 무기보다 정신무장과 교육이 더 중요하다. 북한은 3대 째 대남전략이 변하지 않고 있지만 한국은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자주 바뀐다.더 큰 문제는 교육계와 노동계, 법조계 등에 들어있는 무비판적 북한 동조세력들이다. 전교조의 북한관을 교육받은 학생들은 몇 년 지나면 다 투표권을 얻는 성인이 된다. 요즘 이곳에선 간첩들이 더 큰소리 치고 일부 변호사들이 그들의 범죄사실을 알고도 두둔하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인들도 터무니없고 무책임한 발언을 마구 한다. 얼굴 반듯하고 말 잘하면 다 정치인 되는가. 이해할 수 없다. 정부도 탈북자를 데려오는데 더 주력해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사야 한다. 북한정부를 지원하는 것은 북한 주민을 박해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