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랑 |
2007-02-28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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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을 취하라
by Rick Joyner
July 3, 2006
언젠가 우리가 다루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광야를 건너기 위해 배워야 했던 첫 번째 교훈은 출애굽기 15장 22~26절에서 보듯 쓴 물을 달게 바꾸는 방법이었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개인으로서 혹은 전체 교회로서 우리의 약속된 땅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가 다루어왔듯이, 교회역사에는 많은 쓴 물들이 있었습니다. 해답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척 하면서 그것들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쓴 물의 근원을 남겨둘 뿐입니다. 마라의 물이 나무에 의해 치료되었듯이(나무는 성경에서 늘 십자가를 상징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십자가를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으로 이끌었던 것들을 직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교훈을 배우고 그 비극을 초래했던 것들을 회개해야만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단물 대신 쓴 물을 영속시키는 그 비극들을 반복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마라에서 그의 백성에게 언약하셨듯이, 이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은 치유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이 세상 백성이 구별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재앙으로 고통당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출애굽기의 그 말씀이 옛 언약아래 있던 자들에게 사실이라면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 아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훨씬 더 사실이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7장 22절을 보세요)
이것은 크리스챤들이 결코 질병으로 고통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는 변명을 늘어놓기 위한 원인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유를 찾는 원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원인은 아직도 십자가의 적용을 통해 단 물로 바뀌지 않은 쓴 물의 근원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혹은 지금껏 계속 질병으로 고통받아온 자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크리스챤들은 개인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그들의 삶에 용서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쓴 뿌리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구원이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들은 교회 공동체적으로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누군가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자가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도록 강요하시기 위해 그 분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 전체가 치유될 때, 개개인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로 치유를 받게 됩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개인의 질병이나 고통은 성도가 개인적으로 잘못 행하는 것의 결과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몸을 통해 흐르는, 십자가가 적용되어야만 하는 쓴 물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쓴 물들은 계속해서 질병과 고통을 향한 열린 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모든 질병과 고통에서 자유하기를 진실로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암이나 조류독감이나 또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질병에 대해 눈꼽 만큼도 걱정할 필요도 걱정해서도 안됩니다. 이 세대의 끝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과 이 세상 백성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논의했듯이, 주께서 “쓴 물”이라는 뜻의 마라에서 이 약속의 말씀을 그의 백성에게 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쓴 뿌리들과 용서치 못함, 분노는 질병의 주된 원인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정적인 경험을 십자가를 적용하므로써 긍정적인 교훈으로 바꿀 때, 질병과 고통은 우리에게 접근조차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하고 질병에 대한 괄목할만한 개인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이 승리 가운데 걷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일을 공동체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우리 역사의 쓴 물들은 단 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 사실이 우리에게 더 많은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교황 John Paul 2세는 개신교도들을 핍박한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스위스의 개신교는 재침례론자들을 핍박한 것을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가장 유명한 재침례교도 순교자였던 Felex의 기념비를 그를 핍박했던 위대한 종교개혁가 츠빙글리의 기념비 바로 맞은 편에 세웠습니다. 또한 현재 크리스챤들과 유태인, 크리스챤들과 모슬렘교도 사이뿐 아니라 교회 운동들 사이에 있었던 이전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을 돕기 위해 형성된 전체적인 화해의 운동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역사상 대단히 특이하고, 우리에게 격려가 되고, 우리의 지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정말 놀라운 발전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은 이 땅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설명했듯이, 주께서는 또한 우리에게도 이 화해의 사역을 주셨습니다. 화해는 교회의 일차적인 사업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화해시키는 우리의 사역은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다지 신뢰성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용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기 위하여 우리의 범죄함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분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원수에게 보복하고 원수를 파멸하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시고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진실로 모든 마음이 애통해 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 분을 찔렀던 자들도 애통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으로 그분을 찔렀습니다. 우리가 모두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용서를 위해 기꺼이 그 분이 고통을 받으려 하셨다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이 경험한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이고 영원히 우리 하나님의 기적과 기사의 기초가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행하셨다면, 그의 사자인 우리는 얼마나 더 기꺼이 우리에게 범죄한 자들을 용서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용서 받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회개는 죄와 죽음에 대해 열린 문이 닫히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십자가로 이끄는 성령의 첫 사역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그에 따른 십자가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반복적으로 교회 역사의 부정적인 면들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 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 죄들을 반복할 것입니다. 일단 회개하면, 우리는 재빨리 용서하고 화해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용서하는데 가장 어려운 사람이나 사건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쓴 뿌리를 쏟아내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용서하지 못한 어떤 영역이든 드러내달라고 성령님께 구하십시오. 용서치 못함은 또한 질병이 들어오는 열린 문이기도 합니다. Dudley Hall이 언젠가 말했듯이, “쓴 뿌리는 마치 독약을 마시고 다른 누군가가 병이 나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도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가족이나 교회 지도자들이나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분노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부정적인 마음이 단순한 용서를 통해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유익하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듯이, 똑같은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즉, 우리가 상처입은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용서해야만 합니다. 이 원칙이 사도 바울이 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의 권위의 기초로 그가 받은 고통을 지적한 이유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정적인 경험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권위를 우리에게 풀어놓기 위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치유는 항상 우리의 치료자이신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사도적 권위가 교회에 회복되어지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적 능력과 기적들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진실로 보여주는 그런 능력과 위엄의 사역이 일어나고 있고,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에 흘러왔던 쓴 뿌리와 십자가와 나무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치유가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질병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의 생명의 능력이 교회 안에 너무 강해서 어떤 질병도 교회 근처에도 오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에스겔이 성전에서 흘러나온 소금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것을 보았듯이, 그 일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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