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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밝은 희망(릭 조이너)

겸손 |

2007-01-12 00:00:00 |

조회: 240

  아래의 귀중한 글은 장로회 통합 측 목사님으로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피터 와그너가 격찬한 더치 쉬츠의 책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를 비롯하여 많은 좋은 책들을 번역하여 한국교회들을 섬기고 있는 김주성 목사님이 번역하여 이메일로 제게 보내준 것입니다.

  보내주신 릭 조이너의 꿈과 해석 그리고 앞으로 아시아에 발발할 치명적인 조류 독감에 대한 예언을 접하면서 저는 저희 교회에 출석하는 내과전문의인 신재호 안수집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수개월 전 신 집사님이 저에게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조류 독감의 위험과 치명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목사님 만일을 대비해서 독감예방주사는 꼭 맞으시도록 하세요” 라고 권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주사약을 가지고 와서 저와 교역자들과 교역자 가족들 전체에게 독감예방주사를 놓아주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밝히는 이유는 여러분 모두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라거나 두려움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릭 조이너가 말한 대로 두려움이 우리에게 독감보다 더 무서운 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릭 조이너의 이 예언이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예언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중보하며 기도합시다. 그리고 릭 조이너가 권면한 대로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되고 교회를 가까이 하고 주님을 깊이 알고 용맹을 발하는 성도가 됩시다. 

 

 

모닝스타 예언회보(The Morning Star Prophetic Bulletin)

2005년 9월

먹구름, 밝은 희망

(The Dark Cloud, The Silver Lining)

릭 조이너(Rick Joyner)

 

  2005년 8월 22일, 나는 겉보기에 깔끔하고 조용한 거리를 걸어 내려가고 있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위험이 서쪽으로부터 나를 향해 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려고 몸을 돌렸을 때 나는 아주 불길한 먹구름이 땅을 따라 굴러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만큼 멀리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아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문을 열려고 할 때 그 문은 잠겨 있었지만 내 주머니 속에 열쇠가 있었습니다. 열쇠를 꺼내려고 손을 넣었을 때 나는 두려움에 완전히 압도되어 얼어버렸고 문을 열기 위해 그 열쇠를 주머니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꿈이 끝났습니다.

그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나는 꿈의 해석을 받기 위해 여러 날 동안 주님을 구했고, 예언적 친구인 밥 존스(Bob Jones)에게 물었습니다. 그 구름은 아시아(우리의 서쪽에 있는)에서 일어날 치명적인 바이러스(deadly virus)라는 것이 나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 꿈의 메시지는 안전한 곳이 있으며 우리에게 그곳에 이르는 열쇠, 즉 하나님 나라의 열쇠가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먹구름이 매우 가까이 다가오긴 했지만 하나님 나라 역시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길을 예비하라

먼저, 우리가 반석 위에 집을 건축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닥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합니다(마태복음 7:24-27). 주의 말씀을 듣지 않았거나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아직 회개할 시간이 있지만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꿈속에서 먹구름이 아주 가까이 근접했다는 것은 타이밍(tim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동할 수 없는 나라와 땅에 임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전적으로 안전할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열쇠는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세상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6은 우리를 격려하는 말씀인 동시에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세상에 일어날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인을 놀라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자신이 예언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면 충격을 받을 선지자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주님께서 새 언약의 영광이 예전보다 더 클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는 땅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마지막 때의 예언사역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아는 주님의 양들은 그분의 우리 안에서 안전하게 준비될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얼마 가지 못해서 가장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도록 교리적인 제약을 받아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의 성경구절이 권고하는 바와 같이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술 취함, 즉 빨리 깨어나지 않으면 결국 파멸로 치닫게 될 마비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은 세상에 닥칠 일들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세상에 닥치는 환난과 고난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려고 노력해온 결과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창조주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가 끝날 때 모든 피조물은 그런 어리석은 행위가 결단코 또 다시 시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영원한 증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게 될 태풍과 다른 자연재해조차도 땅의 통치권을 부여받은 인간이 땅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인간이 땅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한 이유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닥칠 일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재난들을 통제하는 권세를 취하여 여러 지역 전체를 대재난에서 보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자들과 순종하지 않는 자들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자들이 장차 다가올 재난들로부터 보호하심을 받는 것은 단순히 그 재난들을 피한 것에 대해 자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그분 없이 살려고 노력해온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과 항상 심판보다는 긍휼을 더 베풀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5:44-46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님은 모든 사람, 심지어 그분을 미워하고 그분과 그분의 도에 반역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다른 어떤 사랑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반역하는 자녀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선대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파멸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선하심이 반역하는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커다란 곤경에 처할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그런 일을 허용하시는지 질문합니다. 사실은 그분이 그런 일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허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세상에 임하는 끔찍한 어려움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시편 115:16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면 그분은 개입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땅에 임하는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 없이 다스리려고 애써온 결과입니다.

이것은 장차 다가올 어려움들이 그분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이시며 그분의 심판조차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그분은 어둠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면서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이 단지 심은 것을 거두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심판이 의로우며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엄청난 긍휼로 가득 채워질 것임을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하고 죄가 인간의 처방으로는 결코 치료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낼 때, 그때야말로 우리가 예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가장 거대한 추수의 때가 될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심지어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정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고 반역하는 자들이었지만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많은 긍휼을 베풀도록 합시다.

  우리가 전염병을 그치게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동안 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임했던 많은 큰 심판들에 대해 언급한 후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11).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우리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고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계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에서 우리는 고라의 반역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46-48절에서는 전염병이 어떻게 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계시를 얻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려 마땅한 상황(우리가 늘 그렇지만)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시편과 계시록에서 나온 것처럼, 향로는 대개 기도와 중보를 의미합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의 중보가 어떻게 전염병을 그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실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시아에서 일어날 그 독감이 치명적이고 강력할 것이지만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서 전염병을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전염병

비록 지금은 전염병의 징후만이 알려져 왔지만 세계 보건 관리들은 어쩌면 지금까지 인류를 강타한 전염병 중에서 가장 심각한 전염병이 머지않아 전 세계를 휩쓸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변종 독감 바이러스는 그 이전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이며 현대 의학의 힘으로는 그것을 그치게 할 수도 없고 억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머지않아 뉴스를 가득 채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뉴스나 혹은 심지어 선지자들의 예언과도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그 독감의 경로를 바꿔 우리의 가족과 교회 및 심지어 도시까지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조류 독감, 혹은 “새 독감”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땅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제관계」(Foreign Affairs)라는 잡지의 7/8월 판은 첫 페이지에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숫자의 사람들을 치사시킬 수 있는 독감 바이러스의 출현을 오랫동안 예견해왔다. 그런데 조류 독감이 바로 그 질병이 될 수도 있다는 징후를 보여 왔다.”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의 한 관리가 그 잡지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잡지는 그것과 관련된 가장 충격적인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기사들은 모두 그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전문가들이 쓴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들은 라는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조류 독감 혹은 새 독감에 대해서도 인터넷을 확인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류 독감에 대해 쓰여진 글들을 읽을 때 당신은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조류 독감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끔찍한 대적임을 명심하십시오. 깨어 각성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읽는 내용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는 400만 인구 가운데 140만 명이 그 바이러스에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거의 30만 명이 그 질병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숫자지만, 그 보고서를 계속 읽어보면, 현재 그 바이러스가 그 질병에 걸린 사람들 중 54%에게 치명적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 가운데 54%가 사망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추산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그들이 추산하고 있는 적은 숫자까지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도 읽게 되겠지만, 현재 그 변종 독감은 그 질병에 걸리는 인간의 54% 내지 58%에게, 그리고 동물의 경우 100%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백신을 아직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한결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설령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백신을 제조할 능력을 보유한 회사들 가운데 많은 회사들이 소송과 다른 문제들로 인해 그 사업에서 손을 떼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백신을 제조할 수 있는 회사가 두세 개밖에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회사들의 생산 능력도 제한적입니다. 백신이 제조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100만개 이하밖에 생산하지 못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숫자는 세계 지도자들과 경찰, 그리고 군인들에게 공급되는 데 그칠 것입니다. 그들은 예견된 공포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위해 우선적으로 백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인간의 문제는 지금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혹은 그분을 알고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원하시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심판보다 긍휼을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최상의 시나리오에 의해 인구의 5%만 사망한다 해도 약 1,500만 명의 미국인에 해당되는 숫자가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미국의 모든 전쟁과 모든 자연 재해를 통틀어 사망한 사람의 숫자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 몇 개월의 기간에 일어날 일입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그 숫자도 “최상의 경우”일 때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 숫자가 「국제관계」라는 잡지의 표현대로 “상상할 수 없는” 숫자가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주님의 손이 조금만 움직여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차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1918년의 지독한 독감 창궐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은 알려진 숫자만 해도 수십만 명에 달했고 기록에 남지 않은 채 사망한 사람도 아마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몇몇 다른 나라들에서는 사망률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 독감으로 죽은 군인의 숫자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조류 독감은 잠재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입니다.

세계 보건 관리들과 과학자들은 문제는 그 치명적인 독감이 발발하느냐 발발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발발하느냐 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 독감이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이 될 것이라는 데에도 거의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 독감은 금년이나 내년, 혹은 몇 년 후에 닥칠 수도 있지만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내가 꾼 먹구름의 꿈이 그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주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집은 그분의 교회이며 이 시대에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권세가 있다

바로 2년 전에 변종 독감이 발발하여 거의 모든 주에서 사람들이 그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계속해서 뉴스에 보도되었고 모든 주에서 예상되는 사망자의 숫자가 발표되었습니다. 밥 존스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를 취한다면 그 전염병을 그치게 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밥과 나는 그 날 우리가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일어나 그 독감에 대한 권세를 취했고 그것이 나라 전체에서 그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날 이후 그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이상 없었을 뿐만 아니라 두 번 다시 뉴스에 보도되지도 않았습니다.

밥과 나는 지금 해마다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런 질병의 발발을 막고 계신 것이 우리에게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적어도 우리에게 영적인 권세가 부여되었다고 느껴지는 영역에서는 그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일어나서 부여받은 권세를 취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장차 다가올 전염병을 막을 수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사망자 수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근접해 갈수록 전염병들이 일어날 것임을 분명히 압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떤 전염병들은 너무나 치명적이고 강력한 것이어서 지구 인구의 3분의 1을 죽게 할 것입니다(어떤 이들은 조류 독감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결정된 것이며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질병들에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호받을 수 있으며 우리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보호할 수도 있습니다. 조류 독감의 위험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꿈속에서, 다가오는 먹구름을 피해 안전하기 위해 나는 주님의 집이라고 알고 있는 그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교회의 관계 속에 있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27-30에서 경고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 그 의식이 상징하는 실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실체란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communion) 또는 공동의 연합(common-union)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교제를 가지라”는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식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의무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만찬 의식에 참여는 하지만 에베소서 4장의 명령에 따라 올바로 주의 몸에 붙어서 실제적인 교제를 갖고 있지 않음으로써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연약하고 병들게 될 것이며 어떤 이들은, 본문이 경고하는 것처럼, 심지어 죽는 일까지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난 몇 년에 걸쳐 나에게 주신 기본적인 경고의 말씀은 교회안의 교제를 떠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스타벅스에서 친구들과 모이는 것이 교회다”에서부터 시작해서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것이 교회다”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변명을 들어왔습니다. 나는 두 사람 이상이 모일 수 있다면 그것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그리고 어떤 모임이든지 교회생활의 일부라는 말에 대해 어느 정도 타당한 진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단코 주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공동의 연합”을 가지라고 요구하시는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 교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터사역(marketplace ministry)은 우리 시대에 점점 증가하고 있는 성령의 움직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그의 교회가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지역교회 안에서 가져야 할 살아있는 지역 교회생활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역교회의 일원이 될 필요가 없다는 기만이 많은 사람들을 진정한 교회생활 안에 있는 살아있는 관계로부터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성숙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내가 꿈에서 본 그 먹구름이 지나간 후에는 그런 미혹에 빠진 채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위의 본문에서 경고한 것처럼, 그런 자들은 연약하고 병든 자들이며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야말로 다가오는 질병에 가장 취약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1:6-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본문에서 “사귐”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이노니아’(koinonia)로서,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석할 때 하는 악수와 등 두드려주기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인간적인 관계까지도 초월하는 깊고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교회에 포함되어졌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느슨하고 우연적인 관계 속에서 표류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숨겨두었던 열쇠를 사용하려고 하겠지만 두려움 때문에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시켰던 미혹과 기만을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간절히 부탁하건대, 교회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교회로 도망쳐 피신하십시오.

많은 좌절감과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함도 주었지만 교회는 세상에 임하고 있는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유일한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현재 교회 안에 존재하는) 좌절감과 실망감을 견디는 자들은 이제 다가오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몸 안의 교제에서 회복될 상상할 수도 없는 기쁨 속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 마땅히 거쳐야 할 모든 다루심을 피해 도망쳐버린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을 회복할 때 우리는 그 몸에 합당한 존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교회의 문은 닫힐 것이고 우리는 열쇠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산고를 이해하라

우리는 영적인 수축작용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통중인 여인에게 미치는 것과 같습니다. 산모가 출산이 가까울수록 자궁의 수축작용이 점점 더 강렬해지고 빈번해지는 것처럼, 그것은 세상에 임할 어려움의 모형이 될 것입니다. 태풍이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지진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질병들이 점점 악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통치하게 될 새로운 시대의 산고를 통해 더 많은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출산의 과정을 겪고 있는 여인이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초점”(focal point)을 찾아 거기에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와 똑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단순히 세상에 닥치는 일들이 아니라 그분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붙들어 매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이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진동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진동할 것이며 그 결과 진동할 수 없는 것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진동이 임할 때, 그 진동으로 인해 무엇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진동할 수 없는 나라에 속한 것인지 아주 분명해질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정도에 비례하여, 즉 주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순종한 것에 비례하여 태풍과 홍수가 닥칠지라도 우리의 집은 견고히 서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시편 32:6-11에 나오는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신자들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이 시대의 종말은 아직 수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 더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래를 위한 전략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붕괴되고 무너지기 시작할 때 우리가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세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일을, 진동이 시작되고 태풍이 불어 닥칠 때까지 미루지 말도록 합시다. 홍수가 닥칠 때는 이미 늦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의 결심은 다니엘 11:31-35에 기록된 것과 같아야 합니다: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 그들이 쇠패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궤휼로 그들과 친합할 것이며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이 있음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 세워지고 있는 바로 그때에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는 것을 봅니다. 진정한 전사들처럼,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전쟁의 소리를 피해 도망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소리를 향해 달려갑니다! 주님은 지금 이 땅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영적 전사들의 세대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다윗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수천에 달할 것이며 엘리야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자들이 수천에 달할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기름부음으로 설교할 자들도 수천에 달할 것입니다. 그들은 곤경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곤경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큰 어둠에 담대히 맞설 것입니다. 그 어둠은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시대 가운데 가장 큰 어둠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넘어질 것이고 어떤 이들은 죽을 것입니다. 지난 「회보」(Bulletin)에 요단강을 건너는 것에 대해 기록한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전념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 주변에 가득한 사망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동할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 위에 세워진 것이 점점 분명해질 것이며 이 악한 현 시대의 체제 위에 세워진 것과 확연히 구별될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분이 모든 정사와 권세와 주권보다 높으신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모든 일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분의 권세를 행사할 것이며, 그 권세는 땅의 어떤 상황이라도 변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두려움 자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마귀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두려움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아는 자들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마귀는 수많은 무리를 끝없는 나락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두려움과 공포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잠언 4:18-19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인 동시에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의의 길 위에 있는 자들은 그 길 위에서 점점 증가되는 빛을 받아 점점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길에 대해 더욱 더 강력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일에 결코 놀라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 가운데 우리가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악인의 길로 행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동맹

뉴스 미디어는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테러리스트들입니다. 그들은 현재 두려움과 죽음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속적인 매체 안에는 내재적인 기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매체의 본질적 속성상 불가피한 것입니다. 큰 기사거리가 없을 때는 큰 사건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선정적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네 신문과 잡지를 사지 않으려고 하거나 자기네 프로그램을 시청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두어 해 전에 다른 큰 뉴스거리가 없었던 이유로 상어의 공격이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과장된 나머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해변에 가기를 두려워했고 그 결과 많은 리조트들이 그 해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해에는 상어의 공격이 평년보다 더 적었습니다. 상어의 공격과 익사사고로 인한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생긴 사고로 인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아예 차 근처에도 가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라크 전쟁 전체를 통틀어 죽은 사람보다 단 두 번의 주말휴가에서 발생하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사실 군복무의 경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군인이 안전하게 행동하는지 알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지 알기 때문에, 그 군인들이 이라크에서 더 안전할지 아니면 국내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것이 안전할지 조사해본다면 아주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라크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그들이 바그다드에서 순찰을 도는 것이 미국의 주(州) 횡단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테러행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행위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재와 같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위협을 느끼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테러리스트의 공격보다는 식료품 가게로 가는 차 안에서나 심지어 번개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잘못된 것들을 두려워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다가 우리는 훨씬 더 위험한 것들에 훨씬 더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게 됩니다.

미디어는 사실을 전달하면서도 여전히 보도하는 내용이나 어떤 주제를 보도하는 방식에 의해 사람을 기만할 수 있습니다. 기자들은 뉴스를 해석하지 않고 단순히 보도한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런 말은 시청자들의 지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사를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입니다. 50년 전에는 신문잡지 기자가 모든 전문직업인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대상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뉴스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와 미디어의 냉소주의가 신문잡지의 신뢰성을 희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문잡지가 변호사나 심지어 설교자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변호사들도 그와 비슷하게 부정적인 평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에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뢰성이 침식당해왔다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지해야 합니다. 이들의 신뢰성이 그렇게 침식당한 원인은 한결 같이 왜곡(distortion)과 선정주의(sensationalism), 그리고 고결한 인격(integrity)의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흔히 어떤 직업 내에서 극히 소수에 의해 생겨난 일이지만 그 직업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회질서에 측량할 수 없는 피해가 가해진 것은 바로 이 세 전문직업인의 신뢰성이 하나같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장차 다가올 일들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 세 전문직업인의 고결한 인격과 신뢰성이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시대를 위해, 우리에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과 신용을 지닌 미디어가 필요합니다. 미디어는 재난의 시대에 극히 중요하며 대개는 사람들과 사태를 돕는 데 많은 유익을 제공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가 불어 닥쳤을 때 미디어가 그 태풍의 위협에 대해 보도하고 또 그 직후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는 등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시기에 신문기자들은 흔히 가장 위대한 영웅들이 되곤 합니다.

변호사들은 다가오는 시대에 질서를 유지하고 회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정과 사업 및 정부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아주 귀중한 도움을 제공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신뢰성 있는 선지자들도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신뢰성은 오직 검증된 인격과 정확성으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듣고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정보를 선정적으로 표현하거나 과대포장하지도 않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도 않을 선지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진리는 기독교의 가장 귀중한 자원이므로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도 진리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선한 청지기로서 충성되고 신뢰할 만하며 깨끗한 자들이 미래에 대한 정보, 즉 다가오는 시대에 전례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될 정보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확고한 토대 위에 서라

우리에게는 진동할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의 시민들은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확신과 담대함으로 서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와 관련된 주 예수님 자신의 예언들이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가장 어려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진동할 수 없는 나라 위에 세웠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이기고 번성하기까지 할 것이며 나아가 준비되지 못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도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실로 교회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현존하는 세상의 시스템은 흔들리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 한 징조로,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지진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들이 강도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기록을 경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은 주변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바로 그때 점점 더 빛나게 되고 점점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 또한 심판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번성은 호사스럽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자들을 돕고 다가오는 왕국의 길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3:16은 요단강의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아담(Adam)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요단강의 물이 “저 멀리 아담에게까지 역으로 굴러갔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 작은 읍이 “아담”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의 요단강을 건너기 시작할 때 우리가 기업으로 받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차지할 것이며 사망은 저 멀리 아담에게까지 되돌려지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인 사망에 속한 모든 것이 반전될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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