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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큰믿음청년연합수양회 사도학교 질의응답모음(1,2,3)

더깊고깊은 |

2009-08-13 00:00:00 |

조회: 147

제3회 큰믿음청년연합수양회 - 2009 부흥을 준비하는 사람들

(2009. 8. 8 마지막날 변승우 담임목사님 사도학교)

 

 

첫 번째 질의응답 (Q&A)

 

Q.

목사님의 설교와 책에 보면 그 동안 읽으셨던 자료들에 대하여서 많이 적용이 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읽으셨던 자료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분리하시는지, 그리고 받으신 계시들을 어떻게 정리하시는지 참 궁금합니다.

 

 

A. (답변 키워드 - 책을 읽는 방법(순서)와 자료 정리, 계시, 성령의 음성 다루는 것과 즉흥설교)

 

 먼저 “책을 어떻게 읽어야 되나?” 그게 아주 포인트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용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사도 있고, 제사장도 있고, 랍비들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율법사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랍비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지 않고, 선지자들을 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썼습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요즘에는 목사님들부터 너무 교사들의 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냥 목사들의 책, 교사들의 책, 복음전도자들의 책. 거기도 물론 가치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진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도들이 다룹니다. 진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파트는 선지자들이 다룹니다. 그래서 성경의 큰 그림을 보셔야 합니다. ‘제자훈련!’ 이러면서 땅굴파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주님의 시각에서 큰 그림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기를 기뻐하셨다.’ 성경의 완성이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도, 사도와 선지자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가장 깊은 것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주로 사도들의 책을 먼저 읽어야 됩니다. 사도들의 책을 먼저 읽고, 선지자들의 책을 그 다음에 읽고, 그 다음에 복음전도자들의 책을 읽고, 그 다음에 시간 있으면 목사들의 책을 읽고, 그 다음에 시간 있으면 교사들의 책을 읽으면 됩니다. 근데 우리 한국의 목사님들부터가 거의 교사의 책, 목사의 책 밖에 안 읽습니다. 그리고 사도의 책, 선지자의 책은 안 읽습니다. 그것이 교계 안에 심각한 미혹을 가져온 것입니다. 심각한 미혹과 구멍을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독서를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또 하나 자료를 관리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다림줄이라는 저의 책에 나와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성경이 따로 있습니다. 요새는 성경에 안하고 인터넷에 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에 좋다 그러면 창세기 1장 1절에 무슨 책 몇 페이지를 쓰고, 그 책에다가는 줄을 옆으로 긋고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씁니다. 이런 식으로 해놓는 것이 제일 편리합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은 아니고, 성령께서 제게 지혜를 주셔서 그렇게 해왔는데 그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할 때 어떻게 저렇게 적절한 것들을 찾아서 인용하나?” 그러는데, 전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설교 준비할 때 항상 그것을 다 찾아봅니다. 항상 다 찾아보면, 다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거기 다 나와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시면 좋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말씀을 다루는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령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앞서가면 안 됩니다. 모든 오류들은 어디서 나오나하면 성령께서 시작했는데 인간이 해석을 마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머리로 마치는 것입니다. 거기서 모든 이단 사설이 나왔습니다. 거기서 모든 오류와 또 잘못된 교리들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임할 때 맨 처음에는 성령의 감동과 함께 레마가 임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조명과 깨달음과 말씀들이 임하는데, 말씀이 그렇게 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말할 것을 주시리니’(마10:19) 그게 환상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생각입니다.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구변과 지혜를 주리라’(눅21:15). 지혜가 무엇입니까? 생각입니다. 구변이 무엇입니까?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랬는데, 지혜도 생각하고 관련 있는 것이고, 구재(口才)도 생각하고 관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초기에는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성경의 말씀이 생각으로 오는데 이 때 자기 생각하고 동시에 섞여 버립니다. 근데 성령께서 부터 그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감동이 있습니다. 내적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레마의 특징인, 말씀이 살아있고 불과 같고 칼과 같고 방망이 같은 특성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날 가르쳐 줬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틀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 때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말씀한 부분하고 그것이 생각을 통해 오면서 자기 생각하고 확 섞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계시만 받으면 잘못됩니다. 계시만 받으면 잘못되고, 지성을 사용해야 됩니다. 지성을 사용하는데 교리를 기준으로 지성을 사용하지 말고, 베뢰아 사람처럼 성경만이 절대 진리기 때문에 성경을 가지고 정직한 마음, 열린 마음,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많은 책을 읽어서 성경을 가지고 교리도 분별하고, 책들도 분별하고, 설교도 분별해서 성경적인 건전한 생각으로 자기머리를 채워나가야 됩니다. 이래야 성령의 음성을 제대로 듣습니다. 무조건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 바른 것이 아니고, 이 두 가지가 병행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의존하는 것, 성령의 가르침을 의존하는 것, “내가 사람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고전2:13) 그랬는데, 지적이 되지 말고 성령의 가르침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을 가지고 분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똑같은 성령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느 부분에서, 어느 성경구절이나 어떤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1초를 말씀하는데 어떤 사람은 서론만 듣습니다. 설교를 예로 들면 어떤 사람은 1대지만 듣고, 어떤 사람은 1대지 반만 듣고, 어떤 사람은 2대지만 듣고, 근데 어떤 사람은 똑같이 1초를 듣는데 서론부터 결론까지 다 듣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1초 만에 설교의 서론부터 결론까지를 성령께 다 듣습니다. 그냥 ‘착!’하면 순간적으로 서론, 1대지, 2대지, 3대지, 4대지, 결론이 다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의 차이는 어디에 있나 하면, 그런 능력의 차이는 여러분의 수준입니다. 자기를 얼마나 준비시켰느냐 입니다. 자기를 얼마나 준비시켰느냐. 모르는 사람한테 말하려고 하면 여러 말을 해야 합니다. 아는 사람한테 말하면 적은 말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에게 말하려고 하면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말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대학생에게 말하려고 하면 적은 말 가지고도 금방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세계를 정진하는 것은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사용해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해가면서 독서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단 교리적으로 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교리까지 분별하고, 그래서 공정하게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면서 정직하게 지식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건전하게, 정직하게 성경에 대한 분별과 지식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의지해 가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상호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여기 밖에 못 듣고 오해합니다. 부분은 오해를 가져옵니다. 부분은 진리라도 오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까지 듣고 오해하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다 듣고 오해하지 않습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목사님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 분이 들은 얘기를 해줬는데, 성령께 들었는데 오해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분을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제가 최근에 그 목사님께 자세히 설명해 준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계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조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공정하게 말씀에 의해서 독서를 하고 지식을 추구하면서 축적하면서 그러면서 지식을 의존하지 않으면서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그의 음성을 들으며 나아갈 때 이것이 이제 점점 개발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단 1초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데, 설교 한편을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시간 얘기할 것을 들을 수도 있고, 두 시간 얘기할 것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나오기 전에 혼자 숙소에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제가 어떤 기도를 하니까 갑자기 그 기도 말에 대해서 설교를 주셨습니다.(종이 뒷면을 보여주시며) 여기 뒤에 써갖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제가 나오기 전에 메모한 것입니다. 여기 서론부터 결론까지 다 있습니다. 순식간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면 두 가지 일을 병행해가면서 계속 정진하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제가 즉흥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비난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즉흥설교는 준비되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즉흥설교를 준비 없는 설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착각입니다. 즉흥설교는 성경을 엄청나게 읽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즉흥설교는 독서를 엄청나게 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면 성경 하나 딱 읽고 어느 구절에 대해서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시는데 말을 하면서 자기가 독서한 것, 자기가 그 동안 깨달았던 것, 축적돼있는 것이 순식간에 연결이 되면서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또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시고, 더 깊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몰랐던 것을 가르쳐 주시고, 이러면서 즉흥설교가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흥설교가 설교준비도 안하고 나와서 제 멋대로 얘기하는 그런 수준으로 치부하는 목사들이 있는데, 정말로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입니다. 즉흥설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즉흥설교는 엄청나게 성경을 읽어야 가능한 것이고, 엄청나게 독서해야 가능한 것이고, 엄청나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그 속에 축적이 돼있어야 그것을 재산으로 해서 그 때 그 때 성경 한 장 읽고 한 시간을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고, 두 시간을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세 시간을 얘기할 수 있으면서도 진부한 얘기가 아니라 성경적인 진리면서도 깊이 있고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지혜로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성령을 의존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즉흥설교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설교보다 즉흥설교가 오히려 더 은혜롭고 그런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준비하지 않고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준비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즉흥설교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설교 원고 쓴 거 본 적 있습니까? 예수님이 “토요일 날은 접근금지다. 설교 준비해야 된다.” 그러는 것 봤습니까? 저는 그 수준이 못 되지만, 예수님은 평생을 즉흥설교를 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즉흥설교한 분이고, 바울도 마찬가지고, 베드로가 삼천명 회개시킨 설교도 즉흥설교였습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이 막 물어보니까 “아 잠깐만요. 세 시간만 시간을 주세요. 설교준비하고 나와서 알려드릴게요.” 그런 것이 아니고, 즉흥설교 한 것입니다. 즉흥설교는 준비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독서를 통해서 성령의 가르침과 분별력이 축적되고, 축적되고, 축적돼서 성령을 의지하고 그 때 음성을 들어가면서 그게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분별을 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리석은 목사들이 ‘즉흥설교가 뭐 어쩌구 저쩌구’ 하면 그게 이상한 것 같고 그러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다 즉흥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정직하게 보면 100% 다 즉흥설교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렇게까지 준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거의 그런 100% 즉흥설교를 했던 인물이 역사상으로 제일 강력한 설교자였던 찰스피니입니다. 찰스피니는 그의 원고가 없습니다. 설교의 원고가 없습니다. 설교한 것을 원고로 만든 것입니다. 해긴 목사님도 거의 원고가 없습니다. 설교한 것을 원고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게 즉흥설교입니다. 즉흥설교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즉흥설교라는 것이 단어가 새롭지만 대단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먼저 하셨던 것이고, 그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제3회 큰믿음청년연합수양회 - 2009 부흥을 준비하는 사람들

(2009. 8. 8 마지막날 변승우 담임목사님 사도학교)

 

 

두 번째 질의응답 (Q&A)

 

Q. 

 목사님께서는 설교 중에 겸손을 거의 빼트리지 않고 말씀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싯홀 목사님의 예언을 통해 목사님이 추구하시는 겸손이 상당한 수준에 있다는 것을 확증해주시기까지 하셨는데 지금까지 보여주신 겸손은 어떤 면에서 결과적인 열매인데 겸손의 열매를 맺으셨던 그 과정이 몹시 궁금합니다.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이번기회를 통해 다시 듣고 싶습니다.

 

 

A. (답변 키워드 - 겸손, 겸손한 자)

 

 교계 안에 겸손에 대한 착각이 있습니다. 겸손은 혼적인 것이 아니고, 겸손은 영적인 것입니다. 혼에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고, 예의바르고 그런 모습에서 자신들이 겸손한 줄 압니다. 근데 그 사람의 영을 보면 교만이 목구멍까지 차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겸손은 혼적인 것이 아니고, 겸손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막 낮추는 것이 아니고, 겸손은 영적으로 눈이 열린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겸손은 정직한 것입니다. 겸손은 진실하고, 공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될 영광을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겸손은 또한 담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 주신 것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가 사도면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고 한 것처럼 그런 것이 겸손입니다. 교만은 혼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그런 것입니다. 지식은 혼의 영역입니다. 교만은 혼에서 나옵니다. 이 혼에서 모든 허영심이 나옵니다. 이 혼에서 모든 자랑이 나옵니다. 이 혼에서 모든 자부심이 나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교만은 혼에서 나오고, 겸손은 영에서 나옵니다. 겸손은 심령의 가난에서 나옵니다. 겸손은 통회하는데서 나옵니다. 겸손은 말씀을 깨닫는데서 옵니다. 말씀이 거울이 돼서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자신이 아니고, 담임목사가 아니고, 저자가 아니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벌거벗고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볼 때, 자기에게 어떤 은사가 있든, 자기에게 어떤 장점이 있든 그것이 또한 원래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씀의 빛을 통해서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영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을 은사나 직분에 대해서 사도바울처럼 담대하게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 않고, 그것 때문에 영광을 취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면서도 그것 때문에 실제로 자기를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겸손은 진실 된 것입니다. 겸손은 허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눈이 열리는 것이고, 영적으로 지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고, 자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고, 진리를 제대로 알면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 중에 대괴수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익한 종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세계 최대 교회의 목사라도 무익한 종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에 대한 질문을 제가 받으니까 조금 당혹스러운 것은 제가 요즘에 교만하고 싸우고 있거든요. 교만하고 싸우고 있고, ‘겸손에 있어서 내가 새로워져야겠다.’ 그것을 몇 일전부터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겸손에 있어서 새로워져야 되겠다. 내 말이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되겠다. 내 말의 상당수가 겸손으로 옷을 못 입고 있다. 내 표정이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되겠다. 내 제스처가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되겠다. 내 설교가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되겠다. 목회자 회의에서 내 처신들이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되겠다.’ 제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겸손으로 옷을 입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도전을 받고 있는데, 그런 질문을 받아서 참 당혹스럽긴 합니다.

 

진짜 겸손한 자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가짜 겸손한 자는 말씀을 잘 알고, 목회하고, 지적인 목회하면서 아주 예의바르고 아주 90도로 허리를 굽혀도 그 사람들은 심령이 안 가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는 심령의 통회함이 없습니다.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 말씀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겸손한 자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겸손한 자는 통회합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떱니다. 교만한 자는 지식적이 되고, 겸손한 자는 계시적이 됩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지식을 의지하고, 겸손한 자는 지식대신 성령을 의지합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사실은 지식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종교적인 것은, 종교는 오만입니다. 종교는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종교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종교는 교만입니다. 종교적인 목사들은 교만합니다. 그들은 지적이고, 교만합니다. 그들은 자기 머리를 의지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지식과 방법과 수단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90도로 고개를 숙여도 그것이 교만이고, 목구멍까지 교만이 찬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종교적이 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목사들은 거의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성령을 의지합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무지를 알기 때문에, 자기 실상을 알기 때문에 의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자는 성령을 의지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고, 계시적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만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겸손 때문에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낮춘다고 말하는 것이고, 겸손한 자는 높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겸손한 사람이 돼서, 지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계시적인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혼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계시적인 사람, 종교적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 그런 사람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3회 큰믿음청년연합수양회 - 2009 부흥을 준비하는 사람들

(2009. 8. 8 마지막날 변승우 담임목사님 사도학교)

 

 

세 번째 질의응답 (Q&A)

 

Q.

 저번에 목사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부흥에는 말씀 부흥이 있고, 성령의 권능과 은사로 일어난 부흥이 있었었다고 하셨습니다. 부흥을 보면 피니와 웨슬리 부흥이 역사상 가장 길게 유지가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외에 다른 부흥은 짧게 끝나서 굉장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는데요. 마지막 대부흥 때는 목사님께서 이 말씀과 은사와 권능의 부흥이 둘 다 같이 나타날 거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대부흥이 더 짧게 끝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피니와 웨슬리의 부흥은 다른 부흥에 비해서 오래 갈 수 있었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A. (답변 키워드 - 부흥의 원리)

 

(어, 형제님 말하는 거 보니까 굉장히 지혜가 있어요. 지혜가 있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데 사람이 순수해가지고 더듬는 거예요. 순수한 사람들은요 사람들 앞에서 말 잘 못합니다. 진짜로...순수한 사람들은요 그렇게 뺀질뺀질하게 조리 있게 말 잘 못합니다. 저는 너무 말을 사람들 앞에서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그냥 지혜가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너무 말을 잘합니다. 너무 여유 있게 아나운서처럼 말을 잘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 좀 밥맛입니다. 저런 사람들이 진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말하는 거를 보세요. 지혜가 있잖아요. 분별을 갖고 있잖아요. 뭔지 알고 있잖아요. 알고 있으면서 지금 질문하는 거거든요. 답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 질문하고 있는 건데, 그게 좀 괘씸하긴 하죠.(하하하 웃음^^) 저거는 여러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저런 사람들을 쓰십니다. 베니힌 말더듬이였잖아요. 모세 말더듬이였잖아요. 바울 말이 시원찮았잖아요. 나겸일 목사님 말 더듬는 사람이었잖아요. 그죠? 그리고 변승우가 말하는 게 꼭 저랬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꼭 저랬습니다. 지금은 안 그런데 그것은 기름부음 받아서 그래요. 베니힌이 기름부음을 받으니까 말을 안 더듬는 것처럼 그런 말씀의 기름부음이 와서 그렇습니다. 제가 원래 저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 <지나가는 말씀이셨지만, 찔림을 주는 내용 이어서 적어봤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다림줄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데, 부흥은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세상일과 다릅니다.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외부에서부터 시작되지만, 부흥은 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흥은 지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영을 만질 수 있는 것이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나온 것처럼 영을 거듭나게 하고,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나온 것처럼 영을 자라게 하고, 에베소서 5장에 나온 것처럼 영을 거룩하게 합니다. 영을 만질 수 있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이 만짐 받을 때 회개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이 만짐 받을 때 믿음이 터져 나옵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10:12) 원어에 보면 레마입니다. 레마는 지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혼에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영을 만지는 것입니다. 영을 건드리면 저희가 찔려 회개했던 것처럼 영을 찌르는 말씀이, 영을 건드리는 말씀이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지옥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대다수 목회자들과 설교자가 지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혼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을 못 만지니까 회개가 안 터집니다. 영을 못 만지니까, 마음으로 믿어야 되는데 마음은 영이고 말씀이 영을 건드려야 되는데 말씀이 혼 밖에 안 건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노라’(약2:14)하고 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마7:21~22) 하고 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혼에서 신앙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거듭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 명목신자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말씀만이 영을 만집니다. 지적인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레마입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성령에 감동된 말씀. 그 말씀만이 영을 만져서 그를 거듭나게 하고, 그를 회개하게 하고, 그를 믿게 하고, 그를 거룩하게 하고, 그의 눈이 밝아지게 만들고, 그를 열심 있게 합니다. 그것이 다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만짐을 받음 사람이 그 심령에서부터 회개하고, 그 심령에서부터 정말 예수님을 믿고, 그 심령이 거듭나고, 그 심령이 사모하고, 그래서 입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고, 부르짖든 안 부르짖든 그의 영으로 기도하고, 그래서 그 영에 성령이 부어지고, 그것이 심령 부흥입니다. 이렇게 부흥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흥시키는 것이고, 도시와 나라에 부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피니의 부흥은 그런 부흥입니다. 속이 꽉 찬 배추처럼 피니의 부흥은 피니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속이 꽉 찬 알찬 부흥입니다. 웨슬리의 부흥도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래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바르게 되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근데 다른 부흥들은 왜 이렇게 수명이 짧으냐. 그들 자신이 말씀으로 만짐을 못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부흥이 영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영에서 시작되지 않고, 외부로 몸으로 막 기름부음이 온 것입니다. “내가 말일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니…”(행2:17) 몸에 부어준다고 하셨습니다. 몸에 은사들이 오고, 몸에 능력들이 옵니다. 영에서 시작돼야하는 부흥이 몸에서 시작되고, 혼에서 시작되고 하니까 그 자신부터 완전히 변화가 안 되고, 그리고 그 열매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말씀이고, 부흥의 양을 결정하는 것이 은사와 능력입니다. 말씀은 부흥의 질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 또 진짜라도 이것이 얼마큼 진짜 부흥인가. 말씀은 부흥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고, 은사와 능력은 부흥의 양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부흥의 질을 결정하는 부흥들이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피니,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이런 사람들을 위시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부흥들은 거의 다가 말씀을 통해서 질이 좋은 부흥이었습니다. 금세기에 온 부흥들은 날라리입니다. 금세기에 일어난 부흥들은 한결같이 거의 대부분이 날라리 부흥입니다. 그것은 오래 못 갑니다. 말씀을 통해서 깊이 만진 것이 없고, 그 안에 진리의 회복이 없고, 그냥 넘어지고, 웃고, 성령 받고, 기적이 일어나고, 예언하고, 그렇게 하니까 확장은 많이 됐는데 알맹이가 별로 없습니다. 속이 비어있는 무 같습니다. 하나는 배추 부흥이고, 하나는 무 부흥인데, 하나는 배추처럼 속이 꽉 차고, 하나는 속 빈 무처럼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 일으키기 원하는 부흥은 이 두 가지를 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질과 부흥의 양을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부흥의 질과 부흥의 양을 극대화시키고 상승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마리의 말이 끌면 100kg를 끈다면, 두 마리의 말이 끌면 300kg 이상을 끌 수 있다고 하면 이런 것처럼 말씀 부흥만 가지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인원이 있고, 성령 부흥만 가지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인원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면 합산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 부흥과 성령 부흥이 함께 가면 상승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줍니다. 상승작용이 일어나서 훨씬 엄청난 부흥이 일어납니다. 결과적으로 훨씬 엄청난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대부흥이고, 그것이 대추수입니다.

 

 부흥이 왜 일찍 끝나느냐. 그 이유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흥을 일찍 끝낼 마음이 없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리빙스턴은 평생 이틀만 부흥을 경험했다. 하나님이 부흥을 주려면 주고, 걷어간다.” 그것은 로이드 존즈가 잘못 안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부흥을 본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부흥을 본 것이 아니라, 교리의 눈을 가지고 부흥을 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흥이 끝나는 것은 하나님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흥이 끝나는 것은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국 사람을 쓰는데, 그 사람이 정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결하지 못하고, 또 하나는 바른 동기를 잃어버리고, 그 사람이 돈에 욕심을 갖게 되고, 또 그 사람이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부흥이 불이 붙는 것인데 그 사람이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변질돼서 부흥이 일찍 끝나는 것입니다. 플로리다에서 신유 부흥이 크게 일어났었는데 그 부흥이 확 타오르다가 그렇게 일찍 끝난 것은 사람이 잘못돼서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져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고, 그 사람이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다 취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취했습니다. 제가 그를 만나봐서 압니다. 그는 사람이 취하지 말아야 될 것을 다 취했습니다. 그래서 매스컴을 통해서 부흥이 확산돼 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많은 기적이 일어나지만 부흥이 그냥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끝나는 것은 사람 때문입니다. 우리가 초점을 바르게 맞춰야 됩니다. 얼마나 지금 부흥의 불이 거세게 타오르고, 우리가 주님 앞에 얼마나 강력하게 쓰임 받는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내가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가, 내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말씀한 것처럼 얼마나 내가 주님을 기뻐하는 자가 되는가, 얼마나 내가 주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고, 얼마나 내가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가, 그것이 여러분의 사역을 좌우합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그것이 부흥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죽는 날까지 신유의 능력이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는 날까지 그 분의 메시지가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리빙스턴이 우리의 모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뭐 이틀주고, 로이드 존즈의 그런 무식한 주장을 따라가면 예수님이 우리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부흥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말씀의 지혜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예언의 능력으로, 치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주의 사랑으로, 기름부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리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부흥에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적은 사탄이 아닙니다. 부흥의 적은 나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탄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 때문에 무너집니다. 부흥의 적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입니다. 우리들의 혼입니다. 그것이 부흥의 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던 것처럼 우리가 계속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나아가면 그 부흥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강해집니다. 점점점점 깊어집니다. 부흥은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의 강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생수의 강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강은 흐르면 흐를수록 깊어지게 돼있습니다. 강은 흐르면 흐를수록 커지게 돼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지키고, 사람이 자기 동기를 지키고, 사람이 기도의 영을 잃지 않고, 사람이 초점을 바르게 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나가게 되면 부흥은 점점 강해집니다. 부흥은 점점 커집니다. 부흥은 점점 깊어집니다. 그것이 원리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다 부흥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육을 얼마나 죽이느냐. 여러분의 혼을 얼마나 깨뜨리느냐. 여러분의 영을 얼마만큼 주님께 드리느냐. 여러분의 영을 얼마만큼 실제적으로 주님께 드리느냐.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대적들은 부흥을 끝낼 수 없습니다. 사탄도 부흥을 끝낼 수 없습니다. 공격만 할 뿐입니다. 끝낼 수 없습니다. 부흥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부흥을 끝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흥을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흥을 끝내지 않습니다. 온 우주에 부흥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온 우주에서 부흥을 끝내게 할 수 있는 것은 저하고 여러분뿐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말씀도 중요하고 은사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자기를 죽이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자기와의 싸움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최고의 승리는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산제사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망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속에서 역사한다.(고후4:12) 바울이 그랬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살아납니다. 한 알의 밀이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아의 죽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수많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죽으면 교회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죽으면 도시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죽으면 나라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죽으면 열방에 생명수의 강물이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죽어서 그런 강줄기들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죽는 다는 것은 영이 죽는 것이 아니고, 혼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우리 영속에서부터 생명수 강물이 바로 나는데, 혼이 영속에서부터 흐르는 그 생명수 강의 흐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육이 그 생명수 강의 흐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육이 그 생명수 강물의 흐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육을 죽이고, 혼을 깨뜨리면 성령의 생명수 강물이 물꼬가 터집니다. 여러분의 육을 죽이고 혼을 깨뜨릴 때, 성령의 생명수 강물이 여러분의 배에서부터 흘러갑니다. 가정으로 흘러가고, 친구에게로 흘러가고, 학교로 흘러가고, 직장으로 흘러가고, 교회로 흘러가고, 도시로 흘러가고, 나라로 흘러가고, 열방으로 흘러갑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가장 큰 싸움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주를 의지해서 가장 큰 싸움에서 승리해서 끝까지 주님 앞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성기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는 날이 최고의 전성기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3년 6개월 동안은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죽음으로 온 인류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고친 병자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사탄의 권세를 묶어버리고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귀신 쫓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승리는 죽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승리는 지혜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승리는 능력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승리는 열심 있는 사역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가장 큰 승리는 죽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을 죽임으로써 자기 혼을 깨뜨림으로써 가장 큰 승리가 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장 큰 열매, 가장 놀라운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고, 주님 앞에 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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