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원 |
2009-05-22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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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단 감시단들은 그들이 감시하는 이단집단보다 교회에 더 많이 악한 영을 내보낸다. 그들이 퍼뜨리는 정신 나간 소리들은 이단집단이 하는 것보다 교회에 더 많은 분열과 피해를 입혔다. 이런 사람들은 유다서에서 말한 "흠잡는 사람들"이 되어 사실 진위에 관계없이 중상과 유언비어를 인쇄해 퍼뜨린다. 유다서에서 경고하셨듯이, "캄캄한 흑암"에(유다서 10-15) 돌아갈 자들로 이미 많은 수가 세상에서 크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저널리즘은 그 선을 넘어, "형제들의 참소자"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여기 적용되지 않는 자들도 있지만 현대 저널리즘의 기본적 원리는 기독교 보다는 희랍철학에 가깝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미디어는 많은 경우 세속 미디어보다도 신뢰와 존경을 덜 받고 있다. 그 결과 영적 진보를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독교 미디어는 기독교의 원리보다 인본주의 철학을 따르는 저널리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미디어는 서구 교회를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독을 퍼뜨리는 출처의 하나가 되고 있다. 불의한 판단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심판하지 않으려 하자 주님은 미디어를 사용하셨지만, 이교도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 주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말씀이 맞는지 성경을 찾아보았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바르게 믿고자 하는 건강한 회의주의가 있는가 하면 단지 의심하기 위한 회의주의도 있다. 건강하지 않는 회의주의는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찾으려 한다.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결함을 크게 강조하고, 자신의 결점은 작게 여기며 만족한다. 이러한 종류의 의심과 냉소는 둘 다 모두 비극이며 치명적이다. 심판의 날,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이런 악한 형태의 의심이 암이나, 에이즈보다도 더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60년대 이후로, 크리스천 미디어를 포함하여 서구의 뉴스 미디어는 거의 완전히 회의주의, 어두운 쪽으로 넘어간 것 같다. 지금은 크리스천 기자 중 비판을 던지지 않고 교회나 운동이나 사건에 대해 기사를 쓰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소문이나 사실상 날조된 가십거리를 보고할 때도 다른 쪽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피해자와 접촉하는 일 조차 하지 않고 있다. 가십거리를 퍼뜨리는 자들도 그것을 시작한 자들만큼 죄가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사람들의 알 권리"나 "잘못을 방지"하는 명목으로 자행된다. 성경은 충격적일 만큼 정직하게 성경에 나온 위대한 인물들의 장점과 단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의 방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역사서로 쓰여진 것이지, 잘못을 파헤치기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널리 퍼져있는 비판의 영과 불의한 판단의 영의 출처가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기름부음 위에 서 있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얻은 영향력의 단상 위에 있다. 어떤 자들은 직업 훈련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얻었고, 인본주의 저널리즘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학교를 졸업했다. 철학은 보기에는 지혜롭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진리에는 실제적으로 반대가 된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임무를 받았지만 세상의 영과 타협한 자들도 있다. (릭 조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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