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정치부 justice@chosun.com 입력 : 2007.06.28 03:26 / 수정 : 2007.06.28 05:42
▲ 안용현·정치부
작년 10월 중국 선양(瀋陽) 한국 총영사관의 보호를 받다가 중국 공안(경찰)에 체포돼 강제 북송된 국군포로 가족 9명의 남한 친척들은 ‘사고’ 직후 전화벨만 울리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정부가 북으로 끌려간 가족의 소식을 알려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전화만 보면 울화통이 치민다. 8개월이 넘도록 정부로부터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어서다.
국군포로 L(1996년 사망)씨의 남동생(73)은 북송(北送)된 형의 손자·손녀가 남긴 여행 가방을 지난 24일에야 열었다. 그는 “손주가 영사관에 들어가기 직전 ‘곧 남한에 간다’며 맡긴 것”이라고 했다. 가방에는 중국어 기초 교재와 남한의 작은할아버지가 사준 옷들이 있었다. L씨는 “가방을 열면 손주가 영영 못 돌아올까 무서워 그냥 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체념했다고 한다. 그는 개별 수소문 끝에 형의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물론 정부 연락은 없었다.
국군포로 K씨의 남한 큰아들(45)은 작년 10월 어머니와 누나, 조카 2명이 다시 북으로 끌려갔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올해 2월 “끌려간 어머니(69)가 작년 12월 형무소에서 동사(凍死)했다”는 날벼락 같은 편지를 받았다. 북한의 동생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은밀히 보낸 것이었다.
작년 10월 ‘사고’가 터졌을 때 남한 가족들은 외교·국방 당국자로부터 “언론에 보도되면 북송된 가족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들었다. 그후 가족들은 냉가슴만 앓으며 언론에 알리지도 않은 채 8개월 동안 정부의 연락만 기다렸다. 한 가족은 “‘영사관은 안전하다’는 정부 말을 믿은 게 바보짓이었고, 정부가 소식을 줄 것이라고 믿은 것도 바보짓이었다”고 말했다.
“그리운 남쪽…” 편지만 남기고 중서 북송된 국군포로의 딸
강제 북송되기 6개월전인 작년 4월 국방부에 편지 “항상 남녘 그리시던 부친 대한민국에 가고 싶어요”
작년 10월 중국 선양(瀋陽) 한국 총영사관의 보호를 받다가 중국 공안(경찰)에게 체포돼 강제 북송된 국군포로 가족 9명 가운데 한 명인 K씨가 ‘대한민국 국방부’ 앞으로 편지를 보내 구명을 호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군포로의 딸인 K씨는 선양 총영사관과 접촉하기 6개월쯤 전인 작년 4월 이 편지를 썼고, 이를 남한 친척을 통해 작년 여름 국방부에 전달했다고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가 25일 전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작년 7월쯤 K씨 편지 내용을 이메일로 받았다”며 “이 편지는 국군포로 가족 송환에 필요한 본인의 자술서 성격으로 국방부가 요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 대표는 “만약 국방부가 이 편지를 받고 곧바로 조치를 취했더라면 K씨와 K씨의 모친, K씨의 아들·딸 등 4명은 자유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이들의 북송으로 편지 속 K씨의 희망은 ‘이루지 못한 꿈’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K씨가 국방부에 보냈다는 편지의 요지다(원문 그대로 발췌해 게재).
“…아버지는 1949년도에 군대에 입대하여 1950년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에 포로 되었다고 합니다. 포로 된 저의 아버지는 ‘괴뢰군 포로 43호’라는 딱지가 붙었고 언론의 자유를 잃었으며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서 참기 어려운 인간생활을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리운 고향에 계시는 형제들을 보고 싶은 마음, 그리운 고향 땅에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분계선이 가로막혀 갈 수 없는 설움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자식들이 포로라는 아버지의 죄 때문에 희망과 포부마저 꽃피우지 못하고 남들같이 떳떳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함께 일하던 동뇨(동료)들과 술좌석에서 속상한 말 한마디 한 것이 죄가 되어 1977년 9월 새벽 2시 ‘정치범’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옥으로 잡혀가셨습니다.
…지금도 저의 눈앞에는 머나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흐르는 눈물 닦을 념(생각) 못하고 조상들의 뼈가 묻히고 형제들이 있는 고향을 그리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항상 저에게 아버지의 고향은 참 살기 좋은 곳이라며 조국이 통일되면 아버지의 조국에 가서 마음껏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던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조국인 대한민국에 가고 싶은 마음 한순간도 접어본 적 없고 대한민국 국민이 꼭 되어 남들같이 자유롭게 떳떳하게 살고 싶으며 이전에 제가 꽃피우지 못한 희망과 포부를 저의 자식들이라도 대신 마음껏 꽃피우며 자유롭게 희망대로 살게 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 가는 것은 저의 아버지의 평생 소원이었으며 지금은 저의 소원이자 저의 자식들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희들의 최고 소원은 대한민국에 가는 것이오니 저희들이 대한민국 국민이 되도록 꼭 도와주십시오.
저는 저의 아들과 딸도 꼭 대한민국에 데리고 가고 싶사오니 우리 가족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시리라 믿으면서….”
● 中서 北送된 국군포로 가족의 비극
평생 고생만 해온 어머니는 체포 50여일 만에 얼어 죽은 시신으로… 아들은 보위부 무서워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해…
작년 10월 중국 선양(瀋陽) 주재 한국 영사관의 보호를 받다가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혀 강제 북송된 국군포로 K씨 가족(26일자 A6면 참조)의 불행은 1977년 K씨가 ‘정치범’으로 끌려가면서 시작됐다.
K씨의 맏딸이 탈북 후 남한에 정착한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K씨는 1949년 국군에 입대해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이후 K씨는 함경북도 탄광에서 ‘괴뢰군 포로 43호’란 딱지를 붙인 채 노역에 동원됐다. 50년대 후반 B씨와 결혼해 6남매(3남3녀)를 뒀지만 자녀들은 ‘출신 성분’ 때문에 대부분 초등학교만 마치고 탄광으로 끌려갔다. 특히 맏딸은 어릴 때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여 음악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역시 탄광으로 가야 했다. K씨의 맏딸은 편지에서 “아버지가 너무 원통해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 속에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썼다. K씨는 술자리에서 이런 불만을 토로했다가 ‘77년 9월 새벽’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후 30년 동안 생사조차 모른다고 한다.
부인 B씨는 온갖 천대 속에 6남매를 키웠다. 남한에 있는 K씨 큰아들은 “30대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는 고생을 하도 해 허리를 못 편다”고 했다. B씨는 99년 맏딸·셋째아들 등과 탈북해 7년간 중국에서 숨어 지냈다. 큰아들은 98년 먼저 북한을 탈출, 중국에 있었다. 큰아들이 2005년 남한행에 성공하자 B씨는 작년 10월 맏딸 가족과 함께 선양 영사관까지는 들어갔다. 남편의 고향 땅과 큰아들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러나 B씨는 믿었던 한국 영사관이 안내한 민박집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돼 다시 북으로 끌려갔다. 맏딸과 두 손녀도 같이 북송됐다.
북한에 있는 K씨 둘째아들은 편지에서 “어머니가 (작년) 12월 3일 사망했다”며 “시신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고 썼다. 사망확인증까지 편지에 첨부했다. 남한의 큰아들은 “어머니가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생만 하시다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한 영사관의 허술한 조치로 체포된 지 50여일 만에 동사(凍死)한 것이다. 북한의 둘째아들은 “어머니의 영정을 앞에 놓고 마음대로 울지도 못했다”고 썼다. 북한 보위부의 눈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함께 끌려간 맏딸과 그녀의 두 자녀는 아직 관리소(형무소)에 있다고 한다.
1998년 큰아들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탈북했었다. 그는 베이징 대사관을 거쳐 선양 영사관을 찾아 국군포로 가족임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큰아들은 “그때 영사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남북관계가 잘 풀리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한국 돈 3만원쯤을 여비로 줬다고 했다. 장남은 “그 뒤로 7년간 남한에 갈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현재 K씨 가족 중 부인은 사망했고, 큰아들과 셋째아들은 남한에, 세 딸과 둘째아들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10월 정부의 소홀함이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던 한 가족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