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생각 |
2008-10-02 08:0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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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을 소성시킬 교회가 되는 비결
<2008. 9. 19. 기도회, 변승우 목사님의 즉흥설교>
본문 : 마가복음 11:15~18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모세가 스스로 모세오경에 썼는데,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모세처럼 스스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온유하신 분인데 여기 보면 굉장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온유하신 분이 성전에 들어가서 매매하는 사람을 내쫓아버리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밥상 엎어버리는 것은 혹시 보셨는지 몰라도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의자를 엎으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보통 집도 아니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것들을 가지고 나가라 하시면 되지 성전에서 의자를 엎어버리고 돈을 쏟아버리고 하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혈기 때문에 했으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의 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데서 나온 마음, 그런 동기에서 나온 과격한 행동이면 하늘에서 받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열심이 예수님을 삼켰다고 요한복음 3장 17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비느하스가 간음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고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그에게 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는 이런 것이다. 사역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을 잘 분별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목회자가 늘 점잖하기만 하고 늘 부드럽기만 한 것은 반드시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과격한 모습도 있고, 어느 때는 화도 나고... 화는 혈기도 있고 의분도 있습니다. 성경은 의분을 금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데서 나오는 혈기는 죄악이지만 사랑 때문에 나오는 혈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화가 나서 때릴 수도 있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이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사랑의 매를 가장한 폭력이지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자녀를 염려하기 때문에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정말 자녀를 아끼고 자녀가 염려되어서 화가 날 수 있고, 그래서 폭력적일 수도 있고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로 사랑의 매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종교가 만들어내는 어떤 틀에 박힌 사람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것을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들이 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하고 점잖 빼는 것을 싫어합니다. 종교적인, 종교가 만들어 낸 어떤 규격에 딱 맞는 목사, 그런 규격에 딱 맞는 목소리의 소유자, 몸짓의 소유자,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 그런 것은 제 스타일에 안 맞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 특히 성경에 나오는 우리의 완벽한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진정한 온유가 무엇인지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규격화된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화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 겸손이 있는 것처럼 거짓 온유가 있습니다. 가짜 겸손이 많이 있는 것처럼 주님을 의지는 안 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가짜 겸손입니다. 저는 너무 많은 목사들이 가짜 겸손을 가지고 있고 자기 머리를 의지하고, 자기 지식과 수단을 의지하고, 기도도 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멸시하는 그런 오만 방자하면서 성도들 앞에서는 너무 목소리가 겸손하고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이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겸손이 아니라 가짜 겸손입니다.
진짜 겸손은 정말 자기 부족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정말 주님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말씀 말씀할 수 없고, 그래서 성령을 사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기름부음을, 성령 충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와 기름부음을 터부시하면서 늘 강해설교하면서 종교적으로 사람이 아주 세련되게 자기 자신을 훈련시켜서 솜사탕처럼 부드럽기만 하고 이런 것들은 거짓 겸손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온유가 있습니다. 의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진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요, 진짜 의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진리를, 의를 진짜로 사랑하면 의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혈기와 의분은 동기, 뿌리를 보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니라." 로마서 11장 16절에 나온 것처럼, 그 뿌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그 뿌리가 의, 진리에 대한 사랑이면 진짜 의분이고, 그 뿌리가 미움이고, 증오고, 사랑이 없는 것이고 여기서 분노가 나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오래 참지 못하는 것이고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성내는 것이고 그것은 죄악 된 분노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의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온유한 사람은 가짜입니다. 아나운서가 뉴스 진행하는 것처럼 슬픈 소식이나 기쁜 소식이나 목소리가 똑 같은 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온유한 게 아닙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 알고 슬퍼할 때는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때는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의롭고 정당하고 합당한 분노에 의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옥에 던져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산이 망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을 뺏기는 사람도 있고, 죄가 드러나고 심판에 넘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재판장이 재판하면서 강도나 강간범이나 살인범이나 유괴범의 죄를 보면서 당연히 분노를 느끼지, 온유하기 때문에 유괴범을 보고도 분노심이 안 느껴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규격화 된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짓 인격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짜 온유와 가짜 겸손을 갖지 마시고 진짜 온유하시고 진짜 겸손하시는 예수님처럼 여러분도 진짜 온유한 분 되시고 진짜 겸손한 분 되시기 바랍니다.
정원을 가면 답답한 것이 있는데 왜 나무들을 자르느냐고요. 가지치기를 해서 작게도 하고 동물 같게도 하고 그게 뭐가 좋습니까? 나무는 나무라야 좋은 것이지요. 나무는 가지가 척척 뻗고 낙엽이 떨어져야지 낙엽을 왜 다 씁니까?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가을의 정취도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공원에 가면 쉬 식상 되지 않습니까? 나무들을 군인들 머리처럼 싹뚝 잘라놓고, 아니 자라는 나무를 왜 위를 자릅니까? 기분 나쁘게, 끔찍스럽게, 나무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 것이 좋은 것이지요. 인격도 자연스러울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제일 망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투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목사투, 설교투로 설교하면 길들여진 성도들이나 듣고 있지 일반 사람들 보고 들으라고 하면 짜증냅니다. 설교자들이 스피치, 웅변을 배우는데 그것 어리석은 것입니다. 설교와 웅변은 틀립니다. 웅변대회 때 외치는 것을 누가 듣습니까? 웅변대회 때 외치는 것은 얼마나 기교를 잘 부리나 그것을 보는 것인데 설교는 기교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웅변적으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열정적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는 웅변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제스처를 배우는 목사도 있는데 제스처란 게 다른 게 없습니다. 제스처를 너무 현란하게 하는 목사들이 많은데 그냥 손 가는대로 가고 가만히 있고 싶으면 있고,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지 평안하면 평안하게 얘기하고, 흥분했으면 흥분하며 얘기하고, 열정이 있을 때는 열정적으로 외치고, 재미난 얘기는 재미나게 얘기하고 막 깔깔 웃고... 그래야 사람들이 다섯 시간을 이야기해도 지칠 줄을 모르지 다섯 시간을 앉혀놓고 웅변을 하고 설교자 스타일로 설교하면 등뼈가 쑤셔서 못 있습니다.
설교학은 신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저한테 와서 배워야 된다니까요. '말, 너 하는 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해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스피치 끝난 겁니다. '제스처, 손 가는대로 가라.' 사람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겁니다. 엉성한 것 같아도 자연스러운 냇물이, 숲이 좋지, 인공적인 것은 싫습니다. 금방 질려버립니다. 그러니까 말도 자연스럽게 하고 제스처도 자연스럽게 하고 인격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종교화된, 규격화된 인격을 가지지 마십시오. 겸손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겸손이라야, 자연스러운 온유라야 좋은 거고 그렇지 않고 종교적으로 꾸며진 겸손과 온유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연산 온유고, 자연산 겸손입니다. '나는 온유해. 온유한 사람은 화낼 수 없어. 나는 온유하니까 목소리 높일 수 없어. 상스럽고 품위 떨어지니까.' 아니오. 예수님은 항상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온유하신 그분이 가서 상을 뒤집어엎으신 겁니다. 온유한 그분이 온유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고, 온유한 그분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신 겁니다. 온유하신 그분이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렇게 외치신 겁니다. 여러분, 종교화된 온유가 아니라 예수님같이 자연산 온유를, 자연산 겸손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제가 자연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꾸미는 것이 없고 규격화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자연에서 물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사는 것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보는 것도 규격화가 문제 아닙니까? 교리를 가지고 규격화 해 가지고 말씀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말씀은 오른 쪽으로 가라는데 규격대로 따라가니까 한국 교회가 이 모양이고 수많은 성도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봐도 자연스럽게 말씀을 쫓아가고 성령도 방언은 되고 예언은 안 되고.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똑 같은 성령인데, 방언은 옛날부터 받아들이는데 예언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말이 많은 건지. 이렇게 규격화 시키는 것은 안 되고 물 흐르듯이 자연산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말씀도 자연산, 성령의 은사와 역사도, 인격도, 설교의 말이나 제스처도 자연산이라야 합니다.
다섯 시간 수다 떠는 것은 피곤하지 않는데 한 시간 설교를 못 견뎌서 설교를 30분으로, 20분으로 줄인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건 범죄 행위입니다. 성도하고 목사하고 공범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 음식점에 가서 밥이나 고기를 조금 주면 대번에 따질 사람들이, 성도들도 20분 설교하면 좋다고 '설교 짧으니까 좋지?' 누구를 위해서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까? 설교가 들어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설교가 요식 행위입니까? 아무튼 여러분, 자연스러운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17절에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이것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이거 되면 됩니다.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그 교회는 됩니다. 그 목회는 됩니다. 영혼들은 살아납니다. 제가 철야기도회에 철야는 못해도 참석하려고 마음먹고 시도하는 것은 양심이 찔려서 그렇습니다. 지난 주 설교 중에 양심이 되게 찔리는 겁니다. 그때 설교가 안수에 대한 말씀인데, 안수하면서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그 이유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려고 세웠다는데 저는 전무 안 하는 겁니다. 장로들도 세워놓고 안수집사도 세워놨는데 제가 설교하면서 보니까 설교준비하면서도 콱 찔리는 겁니다. '사도들은, 목회자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에 전무하기 위해서 안수집사들을 세웠는데 나는 너무 전무하지 않는다. 나는 기도에도, 말씀 전하는 것에도 너무 전무하지 않는다. 나는 정말 너무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나는 정말 잘못됐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주님 앞에 설 것인가?' 또 설교하면서도 생각해보니까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기 위해서 안수집사들을 세웠다 했는데 나는 안수집사 세울 필요도 없는데 세웠다.' 그래서 제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 제가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주님, 제가 너무 비성경적입니다. 제 삶이 너무 비성경적입니다. 사도라면, 목사라면 기도하는 것에 전무하고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해야 하는데, 저는 기도하는 데도 전무하지 않고 말씀 전하는 데도 전무하지 않고, 그러면서 기도는 딴 사람들이 다 하고, 딴 사람들이 봉사, 헌신 다 하고 저는 월급만 받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부흥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꾸 알려지고 인정은 받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주여, 제가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주여, 제가 잘못됐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해야 하는데, 이거 조금이라도 개선해야겠다. 내가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 같고 저는 워낙 김삿갓 같은 스타일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사도와 선지자의 삶을 따라가는 것은 힘들 것 같지만 흉내라도 내봐야 되는 것 아닌가? 부분적으로라도 본받으려고 애써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제가 기도회를 참석하고, 철야기도회 참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 좋더라고요. 한번 오니까 '또 와야지.' 일주일 중에 화요일 한번만 오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화요일에 오니까, '목요일에도 와야지.' 목요일에 오니까, '다음 주에도 또 와야지. 세 번 다 올까?' 기도하는 게 참 좋은 거더라고요. 기도를 너무 시간 정해놓고 그렇게 할 필요 없어요. 하는 대로 열심히 하다가 끝내는 거예요. 영이 채워지면 되는 것이지 주님 만나고,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께 마음 쏟으면 되는 것이지 길게 하는 분은 계속하시고, 저는 그런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아무튼 무슨 얘기냐 하면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사도의 첫 번째 사명이, 사역이 기도하는 것입니다(행 6:4). 목사의 첫 번째 사명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하니까 한국 교회가 이렇습니다. 기도를 안 하니까 설교가 그렇고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를 안 하니까 교회가 부흥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많고, 성도들의 수준이 낮고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사도의 첫 번째 사명이, 목사들의 첫 번째 사명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설교하는데 전무하고 있습니다. 강해설교하고 제자훈련하고 성경공부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데 전무했기 때문에 그게 목사들의 사역의 거의 전부였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이렇게 병들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고 쇠퇴하고 있습니다. 설교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만 하고 설교를 안 하면 안 되지만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고 우선순위의 문제인데 설교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설교하는 것보다 우선이 기도라면 성도들에게는 예배 참석하는 것보다 우선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보다, 찬양팀 하는 것보다, 예언 사역하는 것보다, 축사사역하는 것보다 우선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사도를 사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목사를 목사 되게 하고, 그 기도가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예언사역을 예언 사역 되게 하고, 축사사역을 축사사역 되게 하고 찬양을 찬양 되게 하고, 예배가 예배 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학교처럼 되면 안 되고 교회는 기도원처럼 되어야 합니다. 기도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도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 중에 기도 처소를 잘 지어서 운영하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거기 두 번 가 봤는데 좋더라고요. 그런데 앞으로는 금식할 때나 가고 놀러나 가려고 합니다. 제가 여기 와서 기도해 보니까 기도원이 필요 없습니다. 여기가 진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겁니다. 제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이면서도 이 교회를 너무 몰랐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듣기는 들었는데 제가 얼마나 현실인지 현실로 인식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석해보고 느낀 것이 아니 어떻게 된 교회가 성도들이 일주일에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삼사백 명이 와서 다섯 시간, 길게는 일곱 시간을 그냥 기도만 하고 가느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된 교회가 교회 성도 수에 비례해 볼 때 삼사백 명이 일주일에 삼 일을, 다섯 시간 또는 일곱 시간 이상 기도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저는 충격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어떻게 이런 교회가 됐는가? 저는 잠만 자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교회가 이렇게 됐는가? 제가 얼마나 악한 자고 부적격자인지 몰라요. 아니 성도들이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나는 뭐하고 있었는가? 성도들이 이렇게 살 때 나는 뭐하고 있었는가?
그리고요 저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큰믿음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고신측이든 통합이든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교회를 자기네들이 어떻게 감당하겠다고 덤빕니까? 이런 교회하고 싸워서 통합이든 고신이든 무슨 승산이 있겠다고 싸웁니까? 삼사백 명의 신자들이 다른 순서 없이 다섯 시간, 일곱 시간을 매주 삼일을 기도하는 교회와 싸우자는 것은 하나님하고 맞짱뜨자는 얘기지. 하나님하고 붙어보자는 얘기지. 그런 교회하고 싸워서 어느 교단이 승산이 있겠으며 그런 교회하고 싸워서 어느 언론이 승산이 있겠으며 그런 교회하고 싸워서 누가 승산이 있겠습니까?
제가 보고 나서요. 제가 워낙 이런 문제는 내려놓은 상태였지만 이걸 보고나서 '와, 우리 교회는 끄떡없다. 견고하다. 이거는 누구도 흔들지 못한다. 저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저걸 막을 수 있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거지. 우리 교회 규모에 비해서 매주 삼일을 삼사백 명이 다섯, 일곱 시간을 그냥 기도만 하는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말이 되겠는가? 승리는 우리 것이다.' 저는 성도님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 파묻혀서, 그분들의 은혜에 같이 빌붙어서 기도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고 강력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아까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제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둘 중에 하나다. 기도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에 강도의 굴혈이 된다." 어떤 집은 기도하는 집이고 어떤 집은 강도의 굴혈입니다. 그런데 강도의 굴혈의 반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로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10:10) 성도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납니다. 나아가서 기도할 때 성령의 생명수 강물이 그 교회의 예배 가운데, 찬양, 설교 가운데, 그 교회의 모든 모임 가운데 강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그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바꿔 말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본 것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내려서 일천 척을 척량하니까 물이 발목에 잠기고, 일천 척을 척량하니까 무릎에 잠기고 일천 척을 척량하니까 허리에 차고, 일천 척을 척량하니까 헤엄을 칠 강이 되어 물고기들이 많아지고 좌우의 나무에 시절을 쫓아 열매들이 열리고 어부들이 생기게 되고 농부들이 있고 추수가 있게 되고 번영하게 되고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 이것은 기도하는 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똑똑한 교회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성도 수가 많은 교회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될 때 에스겔의 환상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한 성에 시내가 흘러 그 성을 기쁘게 하도다." 그 성을 교회라고 볼 때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때 성령의 생수의 강물이 그 교회 안에서 흘러내려서 모든 사람들을 충족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지만 기도하는 집이 되지 않으면 강도의 굴혈이 됩니다. 목회자들도 기도해야 진짜 목자가 되는 것이지 기도 안 하면 강도같이 됩니다. 그 속에 탐심이 있어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목회자들이 강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이용하고 등골이나 빼먹고 노동력이나 착취하고 헌금이나 뽑아내고 강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도적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데 교회가 기도하지 않을 때 교회 안에 도적이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귀신들이 틈타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성도들의 영혼이 거듭나지 못하고, 성도들이 자라지 못하고 은혜도, 성령도, 은사도 받지 못하고 충만하지 못하고 영혼이 잘 안 되니까 범사도 안 되고 경제적으로도 성도들이 안 되고 직장도 못 얻고, 해고 당하고 문제가 생기고 부도가 나고 그 다음에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고 질병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죽을 병에 걸리고 교통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강도의 굴혈은 작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까지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목회자의 사역과 성도들의 전체의 삶을 볼 때 이 모든 것을 무엇이 좌우하고 이 모든 것을 무엇이 결정짓는가?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느냐, 안 되느냐? 목회자가 무릎을 꿇느냐, 안 꿇느냐? 장로들과 중직자들이 무릎을 꿇느냐, 안 꿇느냐? 집사들이 무릎을 꿇느냐, 안 꿇느냐? 성도들이 무릎을 꿇느냐, 안 꿇느냐?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목회자도, 중직자도, 성도도 그렇고요. 교회는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기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있으라 하셨는데, 깨어있는 방법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으라." 누가복음 21장 3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으라.”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때와 시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이 어느 때냐?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성경공부만, 강해설교만, 제자훈련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도폭발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다른 프로그램이나 행사만, 찬양축제만, 은사집회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해야 될 때인 줄 믿습니다. 지금은 목회자부터 성도 전체가 기도해야 될 때인 줄 믿습니다. 저희 교회가 왠 말인지 왠 은혠지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져 있는 것을 감사드리고 목회자가 기도의 사람이 못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로 세워주심을 감사드리고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달려가야 할 줄 믿습니다. 계속 기도하는 교회로 전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로 나가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에스겔 47장에서 본 환상이 문자 그대로 큰믿음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 2절에 그것이 다시 나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만국을 소성(蘇醒)시킨다." 여러분,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 단순히 에스겔의 환상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의 천상의 환상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내려오시는 것, 주님의 영광이 있고 주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 주님이 함께하시고 임하시는 교회. 그래서 성령의 생수의 강물이 흘러넘치는 교회, 생명나무 과실이 줄줄이 매달 맺혀가지고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만국을 소성시킬 수 있는 교회, 단순히 개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만국을 소성시킬 수 있는 교회, 도시를 소성시키고 나라를 소성시킬 뿐만 아니라 만국을 소성시키기 위해서 쓰임 받는 교회, 열방과 열왕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교회, 그게 설교 잘 하는 교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치유, 예언, 전도 잘 하는 교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기도하는 집이 될 때 그 일이 될 줄 믿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때 그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월요일과 화요일과 목요일에 와서 철야기도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밤을 지새우고, 울고 기도할 때 여러분은 만물을 소성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속 기도해 나갈 때 여러분은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만국을 소성시키는 열매를, 결과를 보게 될 줄 믿습니다.
2002년, 장충체육관에서 빌 해몬 박사의 집회 때 제가 열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지쳐서 초주검이 되어가지고 빌 해몬 박사의 기도를 받았는데 그때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너는 말씀에 관한 지식과 말씀에 관한 지혜로 아주 정확한 예언들을 선포하게 되리라." 지금 말씀한 것이 바로 그런 종류의 예언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이면서 또한 예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는 정확한 예언입니다. 교회가 기도하게 되면 에스겔 47장의 환상이 그 교회에서 이뤄지게 될 것이고 시편 46편 4절에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교회가 성과 같이 크게 성장하면서 그런 교회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광경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 임하는 교회, 제프 젠슨이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이 장막을 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좌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보좌에는 바퀴가 달려있습니다. 이동식입니다. 어디에나 갑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임하고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영광 때문에 생수의 강물이 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수의 강물이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명나무 열매들이 맺혀지고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 속에서 성장하고 자라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만국을 소성시키는 역사가, 만국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지식을 통한 예언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의 지혜를 통한 예언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말하면 예언이 아닙니다. "모든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말씀의 지혜와 말씀의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 예언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그런 예언들을 많이 경험해봤습니다. 설교하면서 많이 경험해 봤습니다. 제가 설교하든지, 대화하든지 그런 예언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게 제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게 저의 예언의 은사인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예언의 은사하고 다릅니다. 저는 부족해서 여러분과 같은 그런 예언의 은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사에서 파생된 말씀의 은사와 접목된, 관련된 독특한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저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고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고 저는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의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정확한 것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고, 그걸 가지고 방향제시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이런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오늘 한 얘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될 때 만국을 소성시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될 때 만국을 소성시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 삼회 모여서 드리는 철야기도회가 만국을 소성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비상이 걸려서 종교적인 교단이나 종교적인 교회나, 목사나, 신자나, 이단사냥꾼들이 큰믿음교회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왕국에는 이것이 너무 위협이 되고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협이 안 되는 적을 뭐하려고 목숨 걸고 달려들어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위협이 되는 적이니까 제거하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은 가장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가장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것이고 가장 대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런 핍박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고 핍박으로 인해서 우울해하는 마음 전혀 없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늘의 상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며 뛰놀며 전진하며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맙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에 감사드리고 찬양드리며 찬송드리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왠 말인지 왠 은혠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과 성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왠 말인지 왠 은혠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회에 한 시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기쁨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왠 말인지 왠 은혠지 이 교회가 사도 요한의 환상처럼 되었습니다. 왠 말인지 왠 은혠지 이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생명수 강물이 흐르고 생명나무 열매들이 맺혀지고 그 열매들을 따먹을 수 있습니다. 왠 말인지 왠 은혠지 이 교회가 만국을 소성시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왠 말인지 왠 은혠지 이 교회가 만국을 소성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 이런 영광스러운 일에 저희들을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고 시작과 끝이십니다.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이루시옵소서. 잘못된 교단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루시옵소서. 종교적인 목사들의 매도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루시옵소서. 바리새적인 신자들의 음해와 공격 속에서도 이루시옵소서. 주님이 시작하신 일이십니다. 제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제가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진행하셨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지금까지, 여기까지 이끌어오셨습니다. 주님, 이루시옵소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님, 주님이 이루시옵소서. 주님이 만국을 소성시키시옵소서. 주님이 한국교회를 소성시키옵소서. 주님이 열방의 교회를 소성시키시옵소서. 주님이 이루시고 주님이 높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우리는 찬양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경배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높임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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