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 |
2005-12-08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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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긴 승리
릭 조이너. 2005년 1월 17일.
지난주에는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하고, 추수하는 시기에는 요단강이 언덕에 넘쳤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에는 말세에 추수할 때에 대한 예언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서, 말세에 많은 죽음이 있을 것을 예측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약궤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에 들어섰을때, 강물은 아담 읍까지 말려올라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날마다 죽으며 십자가를 지는 삶 안에서 주님을 따라가며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때, 죽음과 인간의 타락때문에 생겨난 모든것은 아담에게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단강은 사해로 흘러가기때문에 죽음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중요한 영적 실제를 강조하기 위해 행하는 예식입니다. 3세기 이래 기독교는 박해를 받으면서, 기독교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영적인 실제를 예식으로 나타내왔습니다. 세례받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산다는 헌신을 표하는 예식이었습니다. 3세기 이후, 세례받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사는게 아니라 교회에서 십자가의 생명과 능력을 없애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식의 중요성을 작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결혼식은 단순히 결혼이 아니라 예식입니다. 결혼이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식을 치러야 할만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 성찬, 그리고 우리가 받은 다른 중요한 예식들도 예식으로 치를만한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식에서는 우리가 밝히 보여야할 진리가 흐려지면 안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하루종일 물속에 있게 할찌라도, 그들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시킬 수는 없습니다. 물에는 마법적인 것이 없습니다. 능력은 십자가의 삶에 있습니다. 세례는 로마서 6:4-5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헌신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4-5)
잘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물세례를 말하는게 아니라, 물세례가 예표하는 것-십자가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5에서 계속해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라고 하셨을때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주님을 답답하게 했던 그 받으실 세례가 단순히 물에 담갔다가 일어나는 세례이겠습니까? 물론 아니죠. 그분은 임박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세례를 뜻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나라에서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을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세례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죽음이 그리스도 안의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능력과 권세로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도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주님의 세례와 합하여 세례받는 것은 그의 죽음의 목적을 따르는 것, 즉 우리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려놓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부활하는) 진리를 단순한 예식으로 바꾸어버리자 주님의 신성함과 교회와 그 안에 있는 구원을 빼앗기고, 세상에서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는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 아래의 몇몇 구절을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읽으시면서 중요한 것은 문자 그대로 생명과 죽음인 것을 살펴보십시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딤후 2:11-12)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6-17)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살후 1:3-5)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8-11)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생명에 참예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의 죽으심에 참예해야합니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5). 다른 가르침은 그릇된 복음이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갈라놓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하려면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따라 걸어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생명을 주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1세기의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할례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도 자기가 세례받은 날이 바로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한 날이라고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예식에는 참뜻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예식은 그 예식이 뜻하는 영적인 실제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증거하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
주님께서 우리의 세례를 십자가에 달리는 삶이 매일의 실제가 되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자기와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죽은 삶이 가장 자유롭고 능력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삶과 교환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가장 놀라운 자유와 가장 큰 능력으로 우리가 전에는 알지도 못한 선한 일을 행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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