헵시바 |
2006-06-26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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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 과연 성경적인가?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가르침 |
성서적인 입장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딤전 2:4)”신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3:9)"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작정하셨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러한 작정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갈바리를 부인하게 한다.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구절에서 “누구든지(whoever)"는 어떤 사람(anyone)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계속하여 제시하시고, 죄인들로 하여금 순종과 생명을 선택하도록 요청하시는 사실과(신30:19, 수24:15, 사1:16, 계22:17), 한번 은혜를 받은 바된 믿은 사람도 떨어져 나감으로 상실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해진다.(고전9:27, 갈5:4, 히6:4~6, 10:29).
칼빈 무오설(無誤說)이 아닌 이상, 칼빈의 가르침이라도 성경에 비추어보아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쳐 믿어야 하며,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에서라도 성경에 일치한 것은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칼빈주의가 아닌 모든 것은 이단으로 돌리는 신학적인 사고(思考)는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
칼빈의 가르침이든,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든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한 것만이 진리이다. “주의(主義)”에 얽매이는 것은 성경을 편견없이 이해하는데 최대의 장애라고 생각한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시대
먼저 아르미니안주의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하여는 장본인인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한 도르트 종교회의의 역사적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아르미니우스는 종교개혁의 난류가 유럽에 소용돌이 치던 1560년 자유를 애호하던 나라 화란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린 때 그의 홀어머니와 형제들은 가톨릭 신앙을 거부한 까닭으로 그 지방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탁월한 신앙을 인정한 국내 칼빈주의 유지들은 그를 칼빈주의 신앙의 본거지인 제네바에 유학시켰다. 거기서 그는 칼빈의 동료요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서 탁월함을 인정받으며 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사랑받는 성직자와 신학 교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이미 칼빈의 예정설이 성경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교회로부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 문제를 성경에 비추어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히려 그 자신이 의심 없이 믿어온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정에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제한 속죄론이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신학적인 확신은, 후에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로 알려진 그의 가르침의 골자이다. 지금 잘못 소개되고 있는 어떤 내용들은 그이 후계자들이 왜곡시켜 놓은 것도 있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하는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늘어나면서 당시 칼빈주의 개혁파가 주도하고 있던 화란은 일대 신학 논쟁의 와중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예정론에 관한 논쟁
아르미니우스들 특별히 적대한 사람은 같은 대학의 교수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F. Gomarus)였다. 고마루스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전 즉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얼마의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관없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신다는 타락 전 예정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와 인간의 타락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되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받게 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하신 선택은 예지하신 믿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며, 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했다. 그는 이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그러나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성령을 거역하였고, 제공된 은혜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ibid., 253, 254)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만약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사람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사람에 의하여 저항받을 수 있도록 용납하셨다고 논증했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거듭하여 인용하면서, 이토록 확실한 성경의 논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까닭은 은혜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 때문임을 밝혔다. 그는 하나님께서 범죄까지도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타락 전 예정설이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자신들의 범죄 여부에 관계없이 예정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서 무엇보다도 반대하였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신성모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죄와 상관없이, 피조물들을 이미 예정된 멸망으로 저주받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설명하는 것은 비난의 정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신성모독을 선하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밀드레드 와인쿱, 한영태 역,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 -서울: 생명의 말씀사,1987-, 49)
그의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은 그를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펠라기우스는 5세기초 영국의 수도승이었는데, 인간은 범죄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은 선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적인 자력구원설을 주장했었다.
물론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펠라기우스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아르미니우슨 자신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과 일치하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음을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소시누스(Socinus)파라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진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가르침을 행함에 의한 자력구원설로 규정하고 일부교회까지 이에 포함시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역사적인 과오를 되풀이하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무고를 당한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밝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적인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를 열어주도록 국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과로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1609년 10월, 49세를 일기로 참으로 짧았지만 경건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신학적인 능력과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은 그의 비평자들에 의해서도 지금까지 인정을 받고 있다. 교회사의 대가인 필립 샤프도, “그는 유식하고 유능한 신학자였으며, 그이 생애를 쓰디 쓰게 만든 논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온유함과 그리스도인다운 정신을 드러냈다.....남들에 의하여 정죄를 받았으나 그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도르트 종교회의 - 개신교 종교재판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46명의 칼빈주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논쟁을 성경적인 원칙에 의하여 해결하는 온전한 방편으로 다섯 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하는 항변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엄격한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반항변서를 제출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칼빈주의에 항의하는 항변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중에 소집된 국회에서 다루어진 두 주장을 종합하여 간략하게 대조시켜 보면 아래와 같다.”(와인쿱, 58. Schaff, 517~519)
아르미니안의 5개조 전제 | 칼빈주의 5대 강령 |
1.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작정하심 <조건적인 선택>
| 1.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 <무조건적 선택> |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임. <보편적 속죄>
|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 |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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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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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됨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 <저항이 가능한 은혜>
| 4.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시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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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 <조건적인 견인>
|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궁극적인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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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두 주장이 쉽사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이 가열되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우선 열렬한 칼빈주의자로 중앙집권제를 주창하던 총독 마우리스 공(Maurice 公)은, 1618년 7월 졸지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으 정적(政敵)으로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며 공화제를 주창하던 지방자치주의 국가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와 다른 유력한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을 투옥하였다. 그런 다음, 서둘러 같은 해 11월 13일, 이러한 방식의 종교회의를 원치 않은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를 외면하고, 국각가 일방적으로 소집한 종교회의가 도르트에서 열렸다.
참석한 102명의 대표자들 가운데 18명은 칼빈주의 정부가 임명한 위원이었고, 아르미니우스파 대표의 참석은 처음부터 봉쇄되었다. 13명의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는 회의가 시작된 지 여러 주일 후에 죄인의 신분으로 소환되어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받았다. 의장이나 서기 등 모두 엄격한 칼빈주의자로 모든 결의는 일방적이었다. 교회 사가(史家) 필립 샤프의 말대로 “그리하여 아르미니우스파의 운명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에 의하여 예정된 예정론의 예정대로 된 승리였다. 6개월 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논란을 계속하다가 이듬해인 1619년 5월9일 막을 내린다.
결의된 내용은, 예정론의 범위를 그 전까지의 주장이었던 타락 전의 예정에서 타락 후의 예정으로 바꾸어, 타락 후 예정설을 채택한 것 외에는 이전의 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하고, 아르미니안의 5개항의 건의는 모두 이단의 신조로 정죄하였다. 동시에 회의 폐막 4일 후인 5월 13일, 국가를 위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투옥 중이던 아르미니안 정치 지도자 올덴 바르네벨트를 대역죄의 누명을 씌워 처형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로 해양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로티우스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을 성직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무자비한 강압적인 배경 때문에 역사가 중에는 이러한 도르트 종교회의를 칼빈주의자들이 수행한 로마 가톨릭식의 종교재판이었다고 혹평했다. (Motley, Life and Death of Barneveld, Vol. 2, 309, cited in Schaff, 515) 그리고 수준 있는 토록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능력과 배려의 고상한 질서를 배신”하고, “자유를 희생시킨 대가로 정통을 다”졌고, “협소한 신앙고백주의를 재가(裁可)한” 종교회의의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혼탁한 분위기에서 형성된 도르트 신조를 지금까지 공적인 표준 신조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는 화란 밖에서는, 미국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기본정신과 성경의 원칙을 저버리고,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외면한 도르트 종교회의 결의사항을 아직까지도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개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의 지성과 정서를 몹시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신앙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칼빈의 예정론의 역사적 배경 |
예정론에 대한 반응
이상과 같은 위압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칼빈의 예정론이 한 교파의 신조로 굳혀져 지금까지 고수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작부터 성경과 이성에 모두 무리한 논한의 불씨가 되어 왔다. 로마 가톨릭 수도승으로 종교개혁에 가담한 후 제네바로 망명했던 의사 볼섹(Bolsec)이, 예정론은 하나님을 전제군주로 오해시키는 비성경적인 교리라는 의견을 발표하자 격노한 칼빈은 그를 투옥시킨 후 추방하여 결국 그의 옛 교회로 돌아가게 한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칼빈이 자신의 예정론을 개혁교회의 교정 신조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이 옛 신학 동지들이었던 불링거도 자제를 호소했고, 파브리도 유지될 수 없는 교리라고 반대했으며, 멜란히톤은 그것이 헬라사상인 스토아철학의 운명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인으로 고전학자였던 카스텔리오는 로마 가톨릭에서 개종한 뒤, 칼빈에게 와서 배우고 그이 신임을 사서 제네바 고등학교장까지 지냈으며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와 불어로 번역까지 한 박학한 학자였다. 그는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고, 하나님의 의지를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로 갈라놓았다.”고 비평했다. 그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기 때문에 일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것뿐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다른 문제도 곁들여 있었지만, 그는 결국 파면당하고 축출되었다.
스위스의 성서주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비블리안더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여 칼빈의 예정론을 거슬렀다 하여 취리히대학의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네바 밖의 다른 개혁교회들도 칼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정부로 하여금 마지못해 자신의 견해를 수용하게 하였다.
칼빈주의 예정론의 근원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에는 물론 인간의 이성에도 거슬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물의를 일으키고 반대를 받아온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의 근원은 어디인가? 칼빈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그러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간단히나마 서술하는 것이 예정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그 출발을 성경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예외적인 회심의 경험을 거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관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던 5세기의 교부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의 사상에 기초했다는 사실에 문제의 불씨가 있다. 다음의 명백한 진술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몇 가지 전적으로 새로운 견해를 교회 제도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중 몇 가지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절대적인 예정, 그리고 선택된 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이다.”
회심 전까지도 헬라 철학에 동양의 신비사상을 가미한 신플라톤 사상에 깊이 몰두했던 어거스틴에게서 칼빈은 예정론뿐만 아니라 영혼불멸 사상도 물려받았음을 이미 앞장에서 밝힌 바 있다. (John Calvinm Tracts and on the Doctrine and Worship of the Church, Vol.3, 1958, 468, 469)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神政)을 베풀고 있던 때, 자신의 예정론에 이의를 제기한 수도승 출신 의사인 볼섹과 논쟁하면서, 이를 “매우 불쾌하게 느껴, 언성을 높여 반박하고, 성서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예정론이 진실된 교회의 교리라고 변호하였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이나 권위로 성경의 진리라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종교개혁 등 개신교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음과 함께 영혼불멸설을 비롯하여, 그의 그릇된 교회관의 영향을 받은 중세교회가 극에 달한 교권주의를 행사했던 불행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계몽된 이성에도 거슬리게 마련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입각한 어거스틴의 무리한 예정론은, 도덕적인 자력구원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마저도 반감을 갖게 했다. 그들도 타락한 인간의 죄됨과 선을 행하기에 무력한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는 어거스틴과 뜻을 함께 했지만, 그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은 반대했다.
그 이유로는 그의 예정론이,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절망으로 이끌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보았다.” (J. L. 니이브, 서남동 역, 기독교 교리사(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65), 236) 그들은 “선언하기를, 은총은 누구에게나 베풀어지는 보편적인 것이며, 그리스도는 택한자 뿐만 아니라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며, 예정은 예지(豫知)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어거스틴이 그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을 발표했을 때 벌써 적지 않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솔한 신념을 가지고 낙관주의에 빠지게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절망의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의 공적을 인간적 요인으로 돌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ibid., 235)
이러한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 때문에, 죽기 3년 전인 427년에 어거스틴은 두 권의 책까지 써서 자신의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의 교리가 빚어내고 있는 불행한 결과를 막아보려고 애썼던 역사적인 임상(臨床)의 과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렌지 종교회의와 예정론
이렇듯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면서 가열되자, 당사자들은 529년 프랑스의 오렌지(오량쥬)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종결짓기로 했다. 이를 옹호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을 종결짓는 계기로 삼았다.
이 회의에서는 어거스틴의 예정론 가운데 성경과 이성에 현저히 어긋나는 가르침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사람은 구원하시고 그 밖의 사람은 멸망 받도록 무조건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을 배제하여, 하나님께서 죄와 타락까지 예정하셨다는 오해의 여지를 없앴다. 또한 거듭난 사람이 타락하게 되는 것은 진정한 선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왜곡된 의지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딤전2:4),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하여 제한된 속죄를 반대했다. 구원을 위하여는 인간의 자유의지 활용이나 선행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먼저 역사해야 함을 확인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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