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
2006-01-18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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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이 설교는 "예수님의 심장!" 님이 자료로 올린 것을 다운 받아서 복사한 것입니다.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리라”
(고후 1:14)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장의 앞부분에서 자신이 사역하는 동안 겪은 큰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본문과 바로 앞의 두 절에서는 어려움 가운데서 받은 위로와 격려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특히 여기에는 4가지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바울 자신의 양심이 이를 증거합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둘째, 바울 사도는 자기 양심이 자기에게 증거가 되는 것처럼 지금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양심이 자기의 위로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양심이 심판 날에 바울에 대해 증거 할 것입니다.
셋째,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사역의 수고와 고통을 통해 얻기를 원하는 복된 열매는 마지막 큰 심판의 날에 있을 고린도 교인들의 행복과 영광입니다.
넷째,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한 것에 대해, 자신의 재판장이 그 날에 자기의 신실함을 인정해 주시고,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마지막 항목의 세 가지는 본문과 바로 앞의 두 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네 가지 모두가 본문에 다음과 같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본문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영적 아버지로, 자신들 가운데서 신실하게 사역한 사람으로, 심판 날에 자기들이 받을 기쁨과 영광의 수단으로, 심판 날 기쁨으로 함께 만날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그 날에 재판장 앞에서 고린도 교인을 기쁨으로 만나 자신의 사역의 열매로 그들이 받은 영광을 보고 기뻐할 것이며,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기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기대하는 것은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이 재판장 앞에서 틀림없이 만나게 될 것인데, 그 때 가장 위대한 재판장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때 재판장은 자신의 신실함을 인정해 주시며, 이것이 바울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재판장께서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의 기쁨의 면류관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이 자기 양심에 이런 확증이 없었다면 이런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은 바울이 자기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 함축해 주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항목 속에 모두 내포되어 있으며, 본문의 모든 부분 속에 담겨 있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리) 목회자와 교인들은 심판 날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서 반드시 서로 만나야만 한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아무리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헤어져야만 합니다. 만일 생전에 헤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이 반드시 헤어지게 만듭니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확실하거나 안정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세월이 지나도, 태양의 위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어떤 사람이나 가족, 마을이나 교회, 나라에 이상한 일이 생기거나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가장 단합이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분열되고, 가장 거리감이 생기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서로 가장 존중하고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생각이 달라지거나 감정이 식어질 뿐 아니라 한쪽이 다른 쪽에 해를 입히거나 양자 사이의 모든 관계가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먼 곳으로 떠나서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서로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목회자와 교인들이 반드시 한 번 더 만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마지막 큰 심판 날입니다.
나는 앞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심판 날 어떤 목적으로 서로 만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목회자와 교인들이 심판 날 어떤 목적으로 서로 만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 목회자와 교인들이 그런 방법, 그런 목적으로 서로 만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1.목회자와 교인들이 심판 날 어떤 방식으로 서로 만나게 될 것인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문제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사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와 성도들은 심판 날 모든 인류가 서로 만나는 방식으로 만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만남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목회자와 교인들이 심판 날 서로 만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서로 만나는 것과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은 심판 날 온 세상이 서로 만나는 방식으로 만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그 때 함께 있게 될 것이고,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가 선택받은 천사나 타락한 천사를 막론하고 모든 천사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회중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인 모든 회중 각 개인에 대한 구별되는 특별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사람들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보다 훨씬 더 많아지겠지만 무한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이해력과 인지력은 크게 확장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신격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한한 지성의 본질상 어떤 사람은 그 날 다른 사람보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지식이 더 많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특정 사람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서로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들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과 신하들, 지상의 재판관과 재판받은 사람들, 서로 대화를 나누었던 이웃들, 거래하고 논쟁한 사람들, 한 집안 식구들이 그 때 만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자와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그 날에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각자의 관점이 있을 것이며, 분명하게 서로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비록 그 때에 그들은 온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 대해 어떤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함께 모이게 될 대다수 사람들은 지상에서 서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심판받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목양을 받았던 교인들은 서로에 대해 아주 직접적인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은 반드시 특별히 만나게 될 것이고, 함께 재판장에게 인도될 것이며, 모든 것을 심판받아야 할 위대한 날에 있을 모든 일에 대해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의 만남은 만남의 방식에 있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만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서로 만나던 것과는 크게 다를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이 세상에서 자주 함께 만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공적인 예배와 교회의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주일마다 만나고, 그 밖의 시간에도 만납니다. 이 외에도 그들은 자주 만나 교회에 필요한 여러 안건을 의논하고 결정하며, 교회의 권징을 처리하고, 공적으로 순결과 선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교인들이 심판 날 만나는 것은 만남의 방식과 환경에 있어 이 세상에서 서로 만나던 것과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이 회중 속에 있는 죄인들은 목사의 사역과 수고를 통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와 저주의 진노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상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상태로, 영원한 기업을 받기 합당한 상태로 변화될 가능성,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목회자를 만납니다. 또한 성도들은 지금 부패가 많이 남아 있는 상태, 때로 큰 영적인 어려움과 고통을 가진 상태로 목회자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직 자신들의 상태를 행복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할 수 있으며,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배에 참석하면서 소망을 가질 이유가 있고 또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목회자를 교인들에게 은혜 주시는 도구로 삼기를 기뻐하십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지금 이러한 행복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만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이러한 진지한 만남을 통해 큰 유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심판 날에 서로 만나게 될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그 때는 이런 변화를 초래하는 수단을 사용하기 위해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불변의 상태에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불변의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 때 죄책과 죄의 권세 아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이고, 변화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없을 것이며, 구제나 치료 혹은 수단을 사용해서 더 좋아질 아무런 희망 없이 자신의 목회자들을 만날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이미 이전에 남아 있던 온갖 부패, 유혹, 재난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사역을 통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또 다른 해방이나 행복을 이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이렇게 선언될 것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계 22:11).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길잡이와 선생이며, 교회에서 빛과 같습니다. 목회자들은 현재의 상태에서 때때로 교인들을 만나 가르치며, 빛을 비추어 주며, 잘못을 바로잡아 주며, 교인들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치우지려고 하면 “이 길이 정로니 너희는 이 길로 행하라”(사 30:21)고 외칩니다. 또한 합당한 증거를 가지고 진리를 확증해 주며, 오류와 잘못된 견해를 논박하며,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주고, 의문은 풀어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와서 심판하실 때, 모든 오류와 잘못된 견해가 드러나게 될 것이며, 모든 거짓과 속임수가 그 날의 빛 앞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이는 밤의 어두움이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교리는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은 확실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에 대해 큰 확신을 가질 것이며, 잘못을 바로잡는 데 어떠한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목회자와 교인들은 신앙에 대한 어떤 문제에 대해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때로 만나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 논의하며, 서로의 입장을 들을 수 있지만 서로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를 확신시키는 데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와 교인들이 만나 의견이 서로 나누어져 이전보다 더 이상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며, 잘못된 견해를 계속 견지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만남이 의견 분열로 인해 불쾌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심한 선입견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빛과 확신이 아니라 어둠이 증가하고, 진리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나며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교인들이 최후의 심판 날 가장 위대한 심판자의 재판석 앞에서 함께 만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논쟁이나 의견 차이가 없게 될 것이며, 진리의 증거가 분명히 드러나서 모든 논쟁이 끝나며 어느 주장이 옳은지가 영원히 결정될 것입니다.
지금 목회자와 교인들이 만나는 것은 죄인들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각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과 위험성, 율법의 엄격함, 죄인들의 생각과 행동의 악함, 죄인들이 받아야 할 큰 형벌, 죄인들에게 드리워져 있는 진노, 죄인들의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함, 눈멀고 가난함, 무기력함 등을 죄인들에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종종 실패합니다. 목사들의 모든 권면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여전히 어리석고, 각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 때 목회자와 교인들의 마지막 만남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위대한 심판자 앞에서 자신의 목회자였던 자들을 만나게 될 때, 각성되지 않은 양심을 가진 채 만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죄인들은 이전에 목회자에게서 들었던 하나님의 위대함과 위엄, 하나님의 거룩과 죄를 미워하심,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 하나님의 율법의 엄중함,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 죄인들의 말할 수 없는 죄책과 비참 등의 진리에 대해 충분한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 모든 진리에 대해 더 이상 무감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양심의 눈이 완전히 밝아져서 다시는 눈먼 상태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양심의 입이 열려서 다시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목회자들이 공적인 자리나 사적인 자리에서 교인들을 만나는 것은 교인들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적용해 주며, 교인들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지금 목회자들은 자기 교인들의 영혼의 상태를 분별하는 데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최선의 방법을 사용한다 해도 실수가 생길 수 있으며 종종 실수하기도 합니다. 교인들도 자기 목사의 상태나 서로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큰 위선자가 탁월한 성도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반대로 비난받고 사랑이 없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보석인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로 있는 사람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귀중한 성도요 존귀한 자녀라고 생각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종 자신은 행복하고 안전한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은 참된 성도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신실하게 선포되는 회중 가운데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날 수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분명하게 진리를 전달하고, 하나님 말씀의 교리와 법칙들을 청중의 영혼에 가장 분명하게 적용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그 때는 모든 마음의 비밀이 드러나며, 모든 사람의 상태가 완전하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드러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심판 날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속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기만과 자기 기만을 기초로 한 위선자들의 헛된 소망은 영원히 끝장 날 것입니다. 심판 날에는 모든 사람이 서로의 영혼의 상태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목회자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고, 목회자들은 모든 교인의 상태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가 누구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는지, 또 누구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 상태에서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만나 교회 문제를 토론하며, 운영해 나갈 때, 특히 논쟁이 벌어지는 상태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과 견해를 비난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리와 목적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판단과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크게 잘못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 날 목회자와 교인들이 만날 때는 참되고 완전한 빛 아래서 모든 사람들이 행동했던 원리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잘못과 모든 부당한 비난이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지금은 종종 교인들을 만나 영원하며, 불변하여, 보이지 않는 왕에 대해 설교하고,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시키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선포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심을 확신시키며, 미래에 있을 상급과 형벌에 대해 가르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합니다. 그리스도는 심판 날 자기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하나님이며 구주요 재판관으로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실 것이며, 큰 영광 가운데, 거룩한 천사들을 대동하고 가장 분명하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심판 날 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해, 미래의 재판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들으려고 모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상에서 함께 모였을 때 들었던바 재판관이며, 위대한 왕이시며, 큰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만날 때는 서로 부주의하고 조심성이 없는 수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적 예배에서 하나님께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에도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도 않으며, 자신들이 모이는 목적에 대해서도 모르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심판 날의 만남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부주의한 마음이 있거나 졸거나 자신들이 모인 목적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교인은 그리스도께 듣게 될 것들에 대해, 또는 그들이 이전에 그리스도께 듣거나, 목회자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던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할 것입니다. 또한 교인들은 목회자가 재판관 앞에서 자기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심판 날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서 현재 서로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미래에 만나게 될 방식과 상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2. 이제 저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심판 날 어떤 목적으로 만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고하기 위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가 교인들에게 파송하신 그리스도의 종이며 심부름꾼입니다. 목회자들이 자기 사역을 마쳤을 때,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 자기가 행한 일과, 임무를 수행하면서 받았던 대접들을 보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 14장 16~21절에서 큰 잔치에 참석할 손님을 초대하러 주인에게 보냄 받은 종이 자기 일을 마치고 주인에게 돌아와 자기가 행한 일과 받은 대접을 보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주인이 화가 나서 종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냈을 때, 역시 종들이 돌아와 주인에게 자신이 행한 일을 보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장 17절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역자들에 대해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는 자” 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앞에서 말한 누가복음 14장에서 사역자들이 자기 주인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일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임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대접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 큰 날에 자신의 교인들 앞에서 이 두 가지 모두를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즉 목회자와 교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재판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신실한 목회자는 그 때 자신을 잘 영접하고 자신이 사역을 잘 하도록 도왔던 성도들에 대해 기쁨으로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은 그 날에 목회자들의 기쁨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목회자들은 자신과 그리스도께 받은 자신의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지 않고, 목회자들에게 나쁘게 대했던 성도들에 대해서도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성도들을 지상에서 하던 것처럼 그들에게 위로하고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해 증언하며, 그들의 재판관이요 그리스도의 보좌관으로서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교인들은 그 날에 일어나서 자기 양들의 영혼의 유익보다 자기 이익만 추구한, 악하고 신실하지 못한 목회자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둘째, 심판 날 지상에서 서로 분쟁했던 목회자와 교인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 대해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는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 큰 의견 차이와 논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다른 어떤 인간 관계에서보다 더욱 평화롭게 지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어떤 다툼보다 여러 면에서 가장 불행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이런 분쟁이 생깁니까? 교인들은 목회자와 때로는 교리적인 문제로, 때로는 교회 행정적인 문제로, 때로는 사례비 문제로 다툽니다. 때로 이런 다툼은 아주 오래 지속됩니다. 때로 이런 다툼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합리성보다는 어느 한 편의 주도적인 이익에 따라 해결됩니다. 때로 이런 논쟁은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 날 충분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결정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빛과 진리와 공의의 원천이신 오류가 없는 재판관께서 논쟁하는 양편을 심판해 주실 것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누가 옳은지, 누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맞는지를 선언해 주실 것입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목회자와 교인들은 반드시 함께 마지막 날 재판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이 인간 세상에 있었던 모든 분쟁을 결론짓고, 모든 실수를 바로 잡으며, 모든 불의한 재판과 오류와 혼란을 종식시키는 위대한 날이 될 것입니다.
셋째, 논쟁하던 목회자와 교인들은 심판 날 반드시 함께 만나 서로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 세상에서 서로에게 한 행동에 따라 재판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판결과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재판을 집행하실 뿐만 아니라 목회자와 교인 사이를 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 무엇이 옳은지를 선언하시며, 옳고 신실한 자를 인정해 주시며, 불의한 자를 정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과 심판은 완전한 진리와 공의에 따라 시행될 것입니다. 신실한 목회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승리한 자들에 대해 다니엘 12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로 비취리라.” 또한 신실하기는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 이사야 49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또한 목회자를 잘 영접하고 잘 대접하여 준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신실한 교인들과 신실한 목회자들은 서로 기쁨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실한 목회자들을 악하게 대했던 사람들은 심각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4~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또한 신명기 33장 8~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꺽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한편, 신실하지 못한 목회자는 가장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에스겔 33장 6절과 마태복음 23장 1~3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심판 날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재판이 집행될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재판받기 위해 함께 만나 자기뿐 아니라 다른 편이 재판받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 날의 목적은 로마서 2장 5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지는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교인들에게 행해지는 재판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교인들도 재판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자신의 목회자들이 재판을 받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 영원히 해결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선고받고 보상받을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영원한 부끄러움과 고통을 받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3. 이제 왜 하나님이 서로 분쟁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을 심판 날 이러한 방식과 이러한 목적으로 함께 만나게 하시는지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호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악간의 모든 비밀스러운 일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공적이거나 사적인 인류의 모든 행동은 마침내 하나님의 재판석 앞에서 오류가 없으신 재판관께 최종적으로 판결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중요한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호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지상의 가장 큰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목회자들이 목회를 어떻게 하느냐,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목회자들을 어떻게 영접하며,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이거나 사적인 어떤 일시적인 인간 관계보다 인간이 창조된 위대하고 최종적인 목적에 더욱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가 재판받아야 하며 진리와 공의로 공적인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목회자와 교인들은 전지하시고 오류 없는 재판관 앞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상호 관계는 심판 날과 관련된 중요한 일에 특별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심판 날 재판관으로 나타나실 분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심부름꿑이며, 그리스도가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목회자가 교인들 가운데 행하는 직무와 사역은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그리스도께 돌아가 자기의 사역 결과를 보고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입니다. 왕은 그의 모든 신하들의 재판관이며, 신하들은 모두 그에게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왕의 사역자들이 왕국의 일을 위해 특별히 임명받아 어떤 특별한 임무로 파송받았다면 반드시 왕에게 돌아와 자기가 행한 일과 자기가 받은 대접에 대해 보고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마지막 날 재판관으로 나타나실 분의 심부름꾼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받은 사명과 직무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하는 사역은 심판 날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 날의 가장 큰 목적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며, 이와 관련된 모든 일을 정리하며, 그리스도의 나라에 해가 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확정되어, 위대한 왕이신 그리스도가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호 관계가 심판 날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하는 사역이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을 받도록 하며 영원한 심판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날은 이러한 목적으로 정해진 날이며, 공적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어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확정되고 완성되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형벌과 가장 완벽한 비참이 확정되는 날입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호 관계가 심판 날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목회자들의 사역이 이 심판 날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목회자들을 교인들에게 보내신 것은 심판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교인들에게 경고하여, 심판 날 악인에게 선고될 두려운 정죄를 미리 경고해 주고, 의인들에게 선고될 복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죄인들에게 닥칠 진노를 피하며, 성도들에게 주어질 보상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호 관계가 심판 날과 아주 관계 깊기 때문에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호 관계가 심판 날 거론되며 확정되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입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런 목적으로 심판 날 위대한 재판관 앞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말한 것을 토대로 여기 지금 제가 목회 가운데 돌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최근 일어난 일로 우리가 분리되고, 서로의 입장 차이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고, 우리의 현재 상황에 적합한 몇 가지 조언을 주려고 합니다. 또한 심판 날 위대한 심판대 앞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게 해 주려고 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미래에 있을 가장 엄숙한 만남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합당합니다. 최근 생긴 일로 우리에게 영원한 분열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집에 모였습니까? 제 목회 가운데서 돌보아야 할 귀중한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얼마나 자주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경고하고, 지시하며, 여러분에게 성례를 집행했습니까?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렘 25:3)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백성 가운데서 사역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삼 년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저는 제 자신을 예레미야 선지자와 비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레미야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23년 동안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제가 이 교회 목회자로 부임한 것은 23년 전 2월 15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후 저는 이 교회의 성도들을 목양해 왔습니다. 비록 힘이 미약하고,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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