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
2010-08-21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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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란 무엇인가?
강 금성 목사입니다. 이 글이 예언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 교단 총회 자유게시판의 4941번에 올린 “예언사역에 대한 스케치”란 글에 대해 이 석민 목사가 4951번의 “예언 사역의 정당성을 경계하며...”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느낀 점은 교회 안에 ‘예언’에 대한 오해가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오해를 뿌리 뽑고 바른 이해를 갖게 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세 가지 일, 즉 이 석민 목사가 갖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고, 예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원적인 설명과 더불어, 성경에서 예언 사역의 실례를 말씀드림으로써 예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1. 이 석민 목사의 오해
저는 앞서 “예언 사역의 스케치”라는 글에서 계 22:18-19절과 신 18:10-11절이 예언사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이 목사는 예언 사역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성경의 근거로 다음의 구절을 추가 인용했습니다.
(렘 23:16-20)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18-20절은 생략)
그러나 이 말씀은 여호와를 멸시하며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자에게 평안을 빌어주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는 의미이지, 예언사역을 부정하며 예언사역자의 말을 듣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 나라가 망하고 죽거나 사로잡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석민 목사가 예언 사역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에 근거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 구절은 예언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석민 목사의 글에는 성경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이 목사는 ‘예언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세기6장에서 노아에게 찾아오셔서 홍수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시며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고향을 떠나게 하시고 장차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고 예언해 주셨다. 출애굽기3장에서는 모세를 찾아오셔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 하나님의 첫 예언은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이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한다. 구약시대에는 계속해서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했다.”
이 언급 가운데서 우리는 이 석민 목사가 생각하는 예언의 개념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 혹은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생각이 깊이 베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위에 ‘예언의 역사’라고 언급된 내용들은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약성경에 처음 나오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비롯해 신명기에 이르는 다섯 권을 ‘토라’, 즉 ‘율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목사가 예언이라고 한 구절들은 율법이지 예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그리고 예수님도 이 목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율법(토라)이라고 하셨지 예언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가 이 구절들을 예언이라고 한 것은 ‘예언이 장래사를 말하고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기본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교회에 다음과 같은 심각한 몇 가지 악영향을 초래합니다.
첫째, 예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이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은사를 주어 사역케 하시는 예언 사역을 기를 쓰고 이단으로 정죄하려 한다. 이로써 그들은 예언 사역의 폐해를 막고자하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했으나 결과적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한다.
둘째, 예언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을 인정하는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언 사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예언 사역의 도입을 꺼리게 만든다. 이로써 성령께서 예언 사역을 통해서 교회에 부어주시려는 은총을 막아버린다.
셋째, 예언에 대한 이 같은 오해는 기왕에 예언 사역을 하는 이들로 그 사역을 쉽게 부패케 한다. 예언이 ‘장래사를 말하며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뿌리 깊은 오해는 예언 사역자를 타락하게 하고, 예언의 본질에서 이탈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할 예언 사역이 오히려 교회에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예언이란 무엇입니까?
2. 예언의 어원적 의미
언어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 혹은 ‘기호’입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어떤 단어에 대해서, 이 단어는 ‘이러이러한 의미이다’고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예언’이란 단어는 ‘장래 일을 말하는 것’ 혹은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말 ‘예언’이란 단어로 설명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 올바른 설명을 했고, 이해를 했다 할지라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우리말 ‘예언’의 의미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언사역을 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성경적인 예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귀가 따갑도록 말해줘야 하고, 그것도 수시로 언급해서 예언사역자와 예언사역을 받는 대상자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 석민 목사가 성경의 ‘예언’은 히브리어로는 ‘네부아’이고, 헬라어로는 ‘프로페테이아’라고 한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프로페테이아’는 히브리어 ‘네부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의미가 변질된 것이 거의 확실시되므로 논의에서 제외합니다. ‘네부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듣거나 이상을 통해 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네부아’의 의미를 해석할 때 우리말 ‘예언’이라는 단어보다 ‘대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옳다고 여겨집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한 말, 이것이 네부아, 즉 예언입니다.
예언에 대한 히브리어 어원을 논하는 요점은 ‘네부아’가 시간의 개념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우리말 ‘예언’으로 번역되면 꼭 시간의 개념이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장래사를 말해주는 것’이나 ‘길흉을 점치는 행위’가 예언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문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사용된 ‘네부아’의 의미를 가진 예언의 은사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성경에 사용된 네부아의 의미로 예언 사역에 대해 논하고, 성경적 예언사역을 하도록 권장하고 지도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하나님이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사역을 자꾸 장래사를 말하는 것이나 길흉을 점쳐주는 점쟁이나 무당의 행위로 비하하는데 그것은 오해에 기인한 망령된 짓입니다. 예언사역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행사와 관심에 눈뜨게 만들고,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게 하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에 언급된 예언사역의 실제를 소개함으로 예언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3. 성경에 언급된 예언 사역
1)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예언 사역(삼상 9:1-10:9)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좇아 사환과 함께 잃어버린 나귀를 찾지만 찾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찾아야 할지, 이제 아버지가 잃어버린 나귀보다 자기들을 더 걱정할까 싶어 돌아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사무엘을 찾아 ‘우리의 갈 길’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오기 전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오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고 말을 한 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무엘은 두 가지 징조를 말하는데, 하나는 가는 도중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 찾던 나귀들을 찾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더 나아가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이 떡 두 덩이를 줄 것임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나귀들을 계속 찾아야 할 지 돌아가야 할 지... 그런 일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의 완전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선지자를 찾아 우리의 갈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이 사건이 예언사역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순전히 개인적 관심사로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 사울에게 하나님의 경영에 대해 말하고, 그로 그 일에 뛰어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언 사역이 활성화 되어 있는 교회의 신자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탈피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주님을 경배합니다. 눈빛들이 살아 있고, 그들의 심장은 열방을 향해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 품기를 열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환상)을 그들은 자신의 꿈으로 취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질이 다릅니다.
사무엘의 예언 사역에 장래사에 대한 언급들이 들어있지만, 그것은 예언 사역의 중심이 아닙니다. 장래 일은 사울로 하나님의 경영에 참여하도록 확신을 주기 위한 하나의 ‘징조’일 뿐입니다. 만일 이 예언 사역이 없었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었을까요?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확신 없이 많은 망설임 가운데서 행했을 것입니다.
2)다윗에 대한 나단의 예언 사역(삼하 12:1-17)
선견자 나단이 다윗에 대해 예언 사역을 한 것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술수를 쓰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야를 죽인 사건이 있은 후입니다(삼하 11장).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한 부자가 손님을 위해 자기 집에 양과 소가 많은데도, 가난한 자가 자식처럼 기르는 한 마리뿐인 양을 잡았다는 악질적인 행위를 고발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다윗은 사 배를 갚도록 명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단은 그 못된 부자가 바로 왕 당신임을 지적하고, ‘칼이 영영히 네 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단의 이 사역을 통해 다윗은 크게 회개합니다.
나단은 이 예언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다윗의 은밀한 행동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게 하는 ‘지혜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펼친 예언사역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돌이키도록 했습니다.
이 사역의 초점 역시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장래사를 말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나단은 다윗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준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다윗으로 회개케 하고, 다시는 권력을 이용해 탐욕을 채우는 악을 행치 말 것을 주의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연합된 길을 걷도록 했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 사역(왕상 18장)
엘리야의 예언 사역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다음 구절이 잘 보여줍니다.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850명과 대결해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함으로써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합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고백합니다. “(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그리고 백성들은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고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 사역은 반드시 계시로 들은 말씀이나 본 환상에 기초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유나 축사, 혹은 능력 행함을 통해서 사역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만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나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합니다. 예언 사역을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장래사나 길흉을 점친다는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억지입니다. 장래사나 길흉을 말하는 내용이 언급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징조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언 사역은 때때로 개인의 관심사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예언 사역은 하나님의 관심사를 대변해주는 것이고, 그로 그 하나님의 일과 경영에 참여토록 하는 것입니다.
4) 포로 후기의 유다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 사역(말라기서)
말라기서는 4장으로 된 책으로 말라기가 활동한 때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되고 제사를 드리던 때, 그리고 바사의 총독이 예루살렘을 통치할 때인 주전 450-400년경입니다. 성전이 완성된 후 성전 재건 때 보인 열심은 사라지고 종교적 나태와 형식주의가 팽배해졌으며, 제사장들도 긴장이 풀리고 게을러졌고, 백성들은 제물에 대하여 불성실했으며, 이혼과 잡혼을 일삼았습니다. 말라기는 아래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정에서 송사하는 것 같은 형식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모든 단락은 세 가지 단계로 진행되는데, 첫째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잘못을 제기하고, 둘째는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항변이 나오고, 셋째는 그에 대한 여호와의 대답이 나옵니다.
1:1-5/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어떻게 당신이 우리를 사랑했습니까?/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1:6-14/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어떻게 우리가 당신을 경멸했습니까?/너희는 내게 드리는 제사를 번폐스러워했고, 토색한 것,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왔다.
2:10-16/너희(제사장들)는 내게 신실하지 않았다./우리가 신실하지 않았다고요?/그래, 너희가 소시의 짝을 버림으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게 하였다
2:17-3:5/너희는 나를 괴롭게 하고 있다./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게 한단 말입니까?/너희가 말하기를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께 기쁨이 된다 하며,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는도다.
3:6-12/내게로 돌아오라./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돌아갑니까?/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하라.
3:13-4:3/너희는 나를 대적한다./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유익한가 하고 말하지 않느냐?
말라기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영적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들추어내고, 형식주의적 신앙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말라기서에 장래사에 대한 구절이 종종 언급되지만(3:1-6, 16-18, 4:1-6), 말라기의 메시지는 당시 유다 백성의 형식주의적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합니다. 이것이 예언의 주목적입니다.
5)세례 요한의 예언 사역(눅 3:1-17)
어떤 이들은 성경의 예언은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하는 것이지 개인에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 몇몇 교회에서 번호표를 뽑아 순서를 기다렸다가 개인을 대상을 하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며, 예수 이름을 빙자한 점쟁이나 무당의 짓이라고 폄하합니다. 누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의아합니다. 예언 사역을 반대하는 이들은 성경 묵상을 통해 ‘과연 그러한가?’하고 숙고해 봄도 없이 모범답안지를 받아든 학생처럼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언은 이단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비난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말 2:7-8a)라고 했는데, 이를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세례 요한의 예언 사역은 ‘무리’를 대상으로 하기도 했고, ‘개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리들과 군병들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무리나 개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 예언은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고, 나라나 민족을 대상으로 했다는 말이 나옵니까? 예언자들은 사역 대상에서 민족과 개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구절을 보시면 사무엘 시대에도 개인들이 선견자에게 가서 행할 길을 묻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상 9:6,9)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9)(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우리 교회에서도 예언 사역팀은 한정되어 있고, 사역 받기를 원하는 분들은 많아서 번호표를 미리 배부하고, 순서를 좇아 사역을 받습니다. 질서가 있고 좋던데요. 예언 사역을 부정하는 분들의 주장에는 뭐 하나라도 성경에 맞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특별히 예언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예언 사역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이 구절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특별히 성경을 앞서서 말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더군요. 고전 14:1절과 5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에서 예언은 하나의 은사로서 성령의 다른 은사 중 하나인 방언과 비교해 말하는 중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예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예언을 말하는 것이지, 그 예언이 ‘성경’을 의미하고 그래서 성경을 앞장서 말하는 것이 예언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ABC를 무시한 것입니다.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이란 용어 자체에는 시간 개념이 없으며, 장래사를 말하거나 길흉을 점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언은 개인이나 특정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혹 예언 사역자 가운데 계시가 깊고 정확해서 사람의 은밀한 것을 알아내고 장래사를 말하는 이가 있지만 사역할 때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거나 대상자를 하나님께 붙여주지 못한다면 그는 예언사역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런 사역자는 당장에 회개하도록 하거나 사역을 내려놓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임함은 사람에게 권능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근본 목적은 예수님/하나님을 증거 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로 인한 사역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함이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행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앞서 예언 사역의 실례들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것이 예언 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진리의 빛을 비추사 예언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언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이 글을 통해 예언 사역의 초점이 올바른지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끝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예언 사역을 시작해서 나타나는 선악의 열매는 고스란히 그 교회가 감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언 사역에 대해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는 그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언 사역을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맡겨두십시오.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고, 성령께서 은사를 주어 사역케 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뭐겠습니까? 해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외부에서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혹 잘못된 예언 사역자로 인한 교회의 혼란을 염려해서 예언 사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동기를 가졌다고 해서 진리를 거스리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별하십시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그러했던 것처럼, 또 주님도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24장). 예언 사역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십시오. 그것이 진리 안에 거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과거에 예언 사역으로 인해 교회가 입은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줄은 알지만 예언 사역을 시행하는 교회의 목회자들도 과거에(1970-80년대) 그런 피해를 겪어보지 않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행하는 것은 예언 사역의 진수를 맛보아 알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 사역자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언 사역은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는 잠시도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만일 계시를 통해 사역 대상자에 대한 지식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사역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늘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그런 수고와 경건 훈련을 하고 있지만 오해와 그로 인한 온갖 비난을 받고 계신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힘내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큰 열매로 나타나 이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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