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리사랑 |
2013-10-11 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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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비판한다
In Criticism of John MacArthur's <Charismatic Chaos>
구요한 목사
( 서울대 경제학과. 뉴욕 법과대학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졸업. 서울 생명의교회 목사)
존 맥아더는 비록 뛰어난 강해설교자이자 목회자이지만 그의 [은사 I & II]는 건전한 영적 체험의 결핍과 영적 현상에 대한 무지 및 신학적 편견이 낳은 추악한 부산물이다-
필자가 90년대 초에 존 맥아더의 Charismatic Chaos( [은사 I & II ]로 번역됨)1)을 처음 대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경험이나 나쁜 경험에 의해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은사주의자들의 수많은 실책을 자세하고 다양하게 수집한 그의 열심에 놀랐고 동시에 몇 가지 전통적이고 독단적인 교리로 영적인 현상을 쾌도난마같이 난도질하는 그의 만용에 또 한 번 놀랐다.
존 맥아더는 자신이 마치 현대의 선지자인양 서문에서 자화자찬을 주저 않고 늘어놓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책을 보고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해 성경적으로 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편지가 쇄도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필자가 아는 어떤 집사는 존 맥아더가 쓴 [은사]라는 책 제목만 보고 혹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뭔가 배울게 있나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다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하여 조금 읽다가 내다버렸다.
또한 필자가 아는 한국 유수 장로교 신학교 출신의 한 목회자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체험한 후 "한국에서 신앙생활하고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소개 받지 못하고 마치 전통적인 것이 신앙의 전부인 양 잘못 소개한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영적으로 기만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 식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의 일방적인 논리 전개로 악 영향을 받아서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 나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은사운동 변호](Charismatic Manifesto)라도 한 권 집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후 시간이 다소 흘렀고 필자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은사운동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의 주장을 마치 군대의 야전 전투교범처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수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도 어쩐 일인지 오늘날의 성령의 외적인 사역에 관해서는 체험이 있는 평신도보다도 못한 엉뚱한 견해를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양 내세우는 경우를 필자는 너무나 많이 목격해 왔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권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 맥아더도 마찬가지이다. 강해 설교가로 이름이 나있고 스스로 개혁, 보수주의자를 표방하기 때문에 반(反) 은사운동의 성향이 있는 한국의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그의 견해를 금과옥조같이 따르고 있다.
필자 또한 말 그대로 '은사주의자들의 혼란들'을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낀 사람이다. 지나친 건강 축복 복음, 병적인 체험 추구, 영적인 교만, 체험을 말씀 위에 놓는 오류, 오늘날의 계시에 대한 오해, 몇 가지 신기한 영적인 은사를 가져야 신령한 신자라고 착각하는 오류 등 은사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존 맥아더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전통적이고 해묵은 몇 가지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교리로 성경이 지지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나 관행조차 무차별 포격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만용이고 객기에 지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끔찍한 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존 맥아더는 자신이 마치 개혁, 보수신학의 선봉장인 것처럼 과시하지만 필자가 알기에는 그가 제시하는 몇 가지 독단적인 교리는 오늘날 개혁, 보수신학 내에서조차 심각한 도전을 받는 주장들이다. 더군다나 '경험보다는 교리를 중시한다'는 그 자신이 자세한 주석적인 근거도 없이 은사주의자들의 여러 가지 오류를 나열해 놓고는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는 식의 경험적 논리를 서슴지 않고 내세운다.
맥아더 식으로 어느 한 신학 전통의 오류를 파헤친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을 것이 과연 있을까?
존 맥아더 자신의 전신인 '세대주의자의 혼란들'은 어떤가? 심심찮게 시한부 종말론으로 홍역을 치루는 이유는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의 천상 재림 따로, 지상 재림 따로 라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어떤가? 맥아더가 배운 신학 전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필자도 원한다면 맥아더식으로 [세대주의자들의 몽유병]이란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전통은 내세우지만 바른 행위와 삶이 죽어 있는 '죽은 정통'의 폐해는 어떠한가? 교조적 집단이기주의, 개교회주의, 형식주의, 전통주의 및 총회 임원의 부정선거, 장로 및 임직자의 금권선거, 강도사 및 편목 가입으로 인한 금전 개입 등, 필자는 소위 말하는 정통 교파에 직접 소속한 경험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썩어빠지고 화석화되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람이다. 만일 내가 [정통 교회의 흙탕물]이란 책을 출판한다면 맥아더의 [은사] 못지않는 오류를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은사운동을 무작정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부 반(反)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성경의 진리가 왜곡되고 성령의 다양한 사역이 소멸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필자는 맥아더의 주장의 오류와 독단을 그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개혁,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간단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진리는 체험이 아니라 말씀에서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진리는 체험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체험이 진리의 이해를 주도해서는 곤란하지만 체험 또한 진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을 중시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또는 말씀)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시간을 두고 곰곰히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 그 주장의 오류를 발견했다. 이 주장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적어도 성령의 외적인 사역에 관한 한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무 체험에 근거한 인간의 논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말하자면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말씀이나 교리 그 자체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이 해석한 말씀'이란 말이다. 자신들의 무 체험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해석한 말씀'만이 유일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야 말로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록된 말씀은 불변하지만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발전, 변화해 가야 하지 않는가?
성경의 진리는 원어나 역사적인 배경을 연구하고 독단적인 교리에 충실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체험이 없는 경우 사변적이고 편파적인 교리가 생길 위험성이 너무나 많다.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했다가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후에 종전의 견해를 바꾸고 성경을 다시 이해하기 시작한 전문교역자나 신자들의 이름이나 간증 목록을 대라면 책 한 권도 모자랄 것이다.
존 맥아더는 은사주의자들이 반(反)지성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반(反) 체험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둘 다 모두 바른 성경해석과 건전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계시(revelation)라는 말의 정의 문제이다. 개혁, 보수신학은 성령의 감동(Inspiration)과 조명(illumination)을 구분한다. 성경의 기록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성령의 감동은 완전하지만 성령의 조명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보수신학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대해서만 (특별)계시 라는 말을 사용한다.
존 맥아더는 이런 식으로 계시란 말을 정의한 후, 은사주의자들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이들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펄펄 뛴다. 천하에 이런 이단이 어디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개혁, 보수주의자들 예를 들어, D. A. 카슨, 웨인 그루뎀, 번 포이트레스 등이 지적하듯 성경 자체는 계시라는 말을 그렇게 좁은 의미의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계시하다"의 헬라어는 아포칼립토이며 명사형은 아포칼립스이다. 성경에서 이 말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7),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엡 1:17),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계시(고전 14:26)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 하는 것은 조직신학자들의 독단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 보수신학을 접할 기회가 없는 은사주의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계시라는 단어를 성령의 조명이란 차원에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좁은 의미의 전문 술어로만 이해하여, 마치 기록된 성경 계시에 무엇을 더하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들의 용어 사용상의 미숙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성경에 있는대로 사용했지만 듣는 자가 자기들의 신학의 편견으로 그렇게 듣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 못할 이단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계시는 개혁, 보수신학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지 감동은 아니다.
감동(inspiration)이란 말도 문제가 있다. 사실 이 말도 성경이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라틴어에서 생긴 말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성령의 감동(이 경우는 영어로 moved by or prompted by the Holy Spirit 의미에 해당)이라는 말을 너무나 평범하게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거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평범한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하등 잘못이 아니다. 개혁, 보수주의자들도 평범한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계시라는 말만 왜 좁게 전문적인 의미로만 정의하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너스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기만 하면 곧 성경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과민 반응이다. 모든 솥뚜껑을 자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성경 자체가 계시라는 말을 평범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 과연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같은 기적이 지속되는가? 존 맥아더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적 종식론이 마치 개혁, 보수신학의 대표적인 입장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물론 개혁, 보수신학자들인 번 포이트레스, 고든 피, 웨인 그루뎀 및 잭 디어 등도 기적 계속론을 주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의 기적 시기를 3시기(모세, 엘리야 및 사도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기적의 기능을 특별 계시인 성경의 기록을 증거 하는 것으로만 국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적 (또는 이사와 이적)의 기능은 너무나 다양하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요 3:2; 9:32-33),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실(고전 2:4; 고후 12:12),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마 12:28),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마 14:14; 20:34; 막 1:41 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출 14:4; 요 2:11),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마 9:22; 15:28),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왕상 17:1-16, 17-24), 전파하는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사람들을 모아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마 4:24-25) 등 무수히 많은 이유로 기적을 행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런 명백한 성경의 구절들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조직 신학자들의 독단만 앵무새처럼 나열한다. 번 포이트레스는 기적을 특별 계시인 성경의 기록을 증거 하는 좁은 의미로만 국한시키는 조직신학자들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2)
필자는 맥아더에게 묻고 싶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과거의 신학자들이 반대파를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변증법적인 기적 종식론을 마치 불변의 금과옥조처럼 주장하는 그 태도가 과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우는 개혁, 보수주의자의 태도인가? 은사주의자들이 체험에 의해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독단적인 논리로 성경의 진리를 외면하는 오류를 맥아더는 먼저 시정해야 하지 않는가?
II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부정하다가도 자신들이 실제로 체험한 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기적 종식론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자들이 반대파를 대항하고 자신들의 무 체험을 변호하기 위해 고안해낸 인간의 논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기적 종식론은 수백 년의 교회사를 통해 너무나 정교하게 개발, 보완되어왔기 때문에 짧은 지면으로 모든 종식 이론을 반박하기에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체험이 있는 경우는 기적 종식론의 허구성을 금방 깨닫지만 실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논리가 정교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무 체험을 지지해 주기 때문에 좀처럼 기적 종식론을 버리지 못한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존 맥아더의 대표적인 오류 몇 가지를 비판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좀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신앙 변증 시리즈의 <기적은 계속된다>를 보기 바란다.)
첫째 맥아더는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기적과 오늘날의 그것들과를 비교한다. 맥아더에 의하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병을," 그것도 "즉각적"으로 고쳤는데, 오늘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은 모든 병을 고치지도 못하고 고치는데 시간도 걸린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신약적인 기사와 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맥아더는 같은 세대주의자인 노만 가이슬러3)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으며 에드워드 그로스4)도 이 주장을 따른다.
성경은 과연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맥아더가 주장하듯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기록하는가? 도대체 맥아더의 태도가 학자적이지 못하다. 왜 그는 자기의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만을 인용하고 부정하는 구절들은 무시하는가? 그는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減)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걸핏하면 은사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르듯 그 자신이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 아닌가?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맥아더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왜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지 한 명만 고치셨을까?(요 5:1-9).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거나(마 13:5),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어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막 6:1-6).
이 구절들에 의할 때 어쩌면 맥아더 류의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신학 이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즉각적이 아니라 2회에 걸쳐서 소경을 고치셨다(막 8;22-26).
사도 바울도 모든 병을 다 고친 것은 아니다(빌 2:25-27; 딤전 5;23; 딤후 4:20).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가? 맥아더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이란 말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을 경직적으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오류이다. 성경에는 모든이란 말이 5천 5백회 이상 사용되며 여기에 any, none, every를 합치면 그 수는 1만 번을 상회한다고 한다.5)
스타인은 모든이란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과장법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판정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그는, 다른 곳의 기록과 상충되는 경우나, 다른 곳에서의 예수님의 행동과 상충되는 경우, 또는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보편적인 술어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과장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타인의 지침을 따를 때,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고쳤다는 기록은 필자가 예로 든 성경 구절들과 상충되므로 문자적이 아니라 과장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는 목적은, 어떤 특정한 사실을 단순화하여 강조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주의를 사로잡아서 결단과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필사본(기록된 성경)이 태부족하여 듣는 것이 강조된 당시에 단순화한 과장법은 기억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구원설(universalism)이 옳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기록한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요 1:7; 벧후 3:9 등).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의해 그 의미가 제한되므로(마 1:21; 요 17:9; 엡 1:12; 롬 11:7),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제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이 개혁, 보수신학의 입장이 아닌가?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맥아더의 주장은 성경의 기본적인 성경해석학에 위배된다. 개혁, 보수신학의 강점이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논리의 일관성인데 맥아더는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기 위해 성경의 명백한 기록마저 무시하는 횡포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때문이다.
성경을 경직적인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의 오류이다. 이들은 성경 구절들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 "교회의 구원 따로, 이스라엘의 구원 따로"라는 이원론적인 구원관을 주장하며 "예수의 천상 재림 따로 지상 재림 따로"를 주장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원조가 되었다. 제이 아담스는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에 집착한 세대주의자들의 성경해석법을 한 물체가 여러 개로 보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라고 부른다.
더군다나 맥아더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성경해석법을 주장하지만, 전형적인 세대주의적인 용어인 '문자적 해석,' '통상적 의미'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자인 번 포이트레스는 이러한 용어의 개념의 모호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6)
또한 노만 가이슬러의 말장난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예수님이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고치셨다'는 자기의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2회에 걸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막 8:22-26)을 즉각적인 치유라고 주장한다. 즉 한 단계, 한 단계가 '완전한 치유를 향한 즉각적인 치유'였지 불완전한 치유가 아니라는 것이다.7)
'두 번에 걸친 즉각적인 치유'가 성립되는 개념이라면 3번, 4번, 5번 더 나아가서 10번에 걸친 즉각적인 치유 개념도 성립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모두가 완전을 향한 즉각적인 치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군다나 가이슬러는 은사주의자들의 기사와 표적에 대한 목격담을 모조리 부정한 후, 자신은 실제로 드물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수많은 기적 목격담은 부정하고 자신의 목격은 진짜라고 주장하는 그 주장 자체가 다른 사람의 체험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의 체험'은 중시하는 체험적인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맥아더의 또 다른 횡포를 살펴보자. 그는 기적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그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말하는 곳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 (끝난다고 기록한 구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 주.) 또한 성경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구하라고 권면하는 곳도 없다. 신약 성경 모두를 살펴볼 때 신자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명령형으로 말하는 곳은 다섯 군데 밖에 없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으로 충만하라(엡 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20).8)
필자는 맥아더가 어떤 성경을 보는지 궁금하다. 필자가 보는 성경은 맥아더의 성경과는 판이하다. 성령과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이 도처에 있다.
구하라 . . . . 찾으라 . . . . 문을 두드리라 . . . .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 9, 13).
너희는 더욱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신령한 것(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고전 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딤후 1:6)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왜 이런 오류가 생기는가? 맥아더는 기적 종식론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성경에서 '성령이나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 구절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편견과 전제로 인해 분명한 성경의 기록을 외면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바른 신학과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틀릴 수 없다'는 영적인 교만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류를 자아낸 것이다.
III
Q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쟁쟁한 개혁 신학자이다. 그는 강의 시간에 '성경에 기록된 기적은 사도시대에 중지되었으며 악하고 음란한 세대만이 오늘날 기적을 요구한다'(마 12:39)는 요지로 강의했다. 필자는 강의 후 즉시 항의성 질문을 했다. 헤르만 리델보스의 The Coming of Kingdom(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제일의 표적은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는 것이며, 피터 와그너 교수의 연구 조사 등에 의하면 기적은 지금도 지속된다. 그런데도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가?
Q 교수는 전혀 언짢은 기색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미스터 구의 말이 옳다. 나도 피터 와그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발걸음을 돌리는 Q 교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가 존경하는 교수가 실제로는 기적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고 믿으면서도 공적인 강의시간에는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는 그 이중성에 어이가 없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성경 중심의 개혁 신학을 자부하는 이곳에서조차 오늘날 도도하게 밀어닥치는 성령 운동의 거센 풍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자기들의 신학을 애써 인간적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이 측은해 보였다.
이런 대화를 어느 동문에게 말했더니 그는 한술 더 떠서 말하기를 "교수들이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성령 운동이 교내에 불어 닥칠 것이므로 조심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전개한다.
"성령 운동이 밀어닥치는 것이 걱정되어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안하여 나의 신학으로 브레이크를 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개혁주의자라고 자부하는 그 이중성에 또 한번 어이가 없었다.
어떤 운동이 교회에서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한 분야를 강조하면 반대자들은 "그렇게 하면 전통 교회가 중시해 온 xx분야가 소홀히 취급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런 운동에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러면 비판자들은 왜 새로운 분야는 소홀히 취급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개하고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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