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니 |
2007-02-12 00:00:00 |
조회: 238
60년대와 70년대의 위대한 진리들이 많이 교회에 회복되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때를 맞추어 필요한 것이었으나 극단으로 나아가 부흥역사를 탈선시
키고 교회의 부분을 침체와 혼란으로 몰고 가는데 이용됐다. 이는 진리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적용하는데서 저지른 잘못에 기인한
것이 보통이었다.
정확한 교리조차도 수단이 아닌 목표가 될 때 극단으로 이끌려 갈 것이다. 이는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결과를 빚어 극단주의자들이 주는 것과 전혀 마
찬가지의 피해를 쉽사리 입힐 수 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했고 그 다음 이를 기록했다.
그 이래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대신해서 진리에 관한 정확한 개념을 택하여 오고 있다. 이는 하나님 없이 경건의 모양만을 갖는 결과를 빚었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공부한 다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초대교회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정신과 교회생활에 대한 헌신을 가져오려고 그들의 모
든 것을 본 땄지만 또 하나의 죽은 형식으로 끝나 버리게 되었던가? 초대 교회가 공동체를 갖게 된 것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식으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움직이고 계셨던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그의 백성들은 모이기를 원하며 어떤 압력없이 그렇게 했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진리가 생명(삶) 이 된다. 주님이 움직이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모든 형식과 원칙들과 사람을 동원시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뿐
이다.
기독교는 진리와 원칙들의 체계가 아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갖는 관계성이다. 관계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진리와 원칙들은 여전히
지식의 나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 진리들이 아무리 정확하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의 궁극적인 열매는 죽음일 것이다. 관계성이 이룩되었
을 때만 우리는 안전하게 진리와 원칙들을 시행할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똑바로 잡았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들이 주님의 사람들임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결코 없다. 참 된 종을 분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열매에 있다. 물론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교리가 바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교만하게 올바른 교리를 갖기보다 조금
잘못된 교리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겸손한 것이 더 낫다. 잘못되었더라도 겸손한 사람은 고쳐질 수가 있다. 바르지만 교만한 사람은
잘못된 교사보다도 더 교회와 그리스도의 목적에 해를 끼칠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올바른 교리를 갖는 것이지만 주님이 하신 것처럼 실수를 범하는 자들
도 사랑할 수 있는 겸손과 유동성과 관대한 영을 지녀야 한다.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교리를 생각해 보라. 이는 1960년대 말기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강조되었을 때는 시기적절한 진리였다. 세상과 교회는 불법과
혼란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경우 실제로 바로 이 교리자체에 모순되는 결과를 빚었다. 아주 겸손하며
순종하는 많은 하나님의 남녀종들이 어떤 사람들이 세운 복종의 교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배척을 받고 사역으로부터 쫓겨났다. 동시에 아주 거만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이 복종의 교리에 따르거나 또는 적어도 말로는 이 교리를 정확히 표현한다 해서 교회에서 활개치며 높은 자리고 올라가게 됐다. 복종에
관한 정확한 교리를 갖는 것과 복종하는 것,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진리는 생각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 홀로 떠돌아 다니는 신자들 " 이 그리스도의 몸에 혼란을 빚어 왔지만 홀로 떠돌아 다니는 신자들 전부를 합해도 복종을 지나치게 강조한 몇몇이 빚은
불화와 혼란에 거의 미치지 못한다. 성경 어디를 봐도 몸에 복종하지 않는 이들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없다. 우리에게 주신 경고는 머리에 붙어 있지 않은
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널리 인정 받고 있는 숱한 복종의 교리들에 따르면 머리에 이어지지 않고도 몸에 제대로 이어질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런 형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참으로 머리에 이어져 있다면 비록 우리의 교리에 맞지 않고 또 우리가 받아드릴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몸에 역시 제대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진리를 요구하기가 생명을 요구하기 보다 쉽다. 주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주님을 모르기가 쉽다. 우리가 주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 알지 못하는 신" 을 경배할 수도 있다. 바른 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다가오는 불로부터 우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를 인정하고 따른다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알아야만 한다.
릭조이너의 추수란 책의 일부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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