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Team |
2021-01-07 11:27:29 |
조회: 464
이번 주 율법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마음속에서 시원함이 불꽃놀이처럼 팡팡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율법에 대해서 갖고 있던 의문이 전부 속시원하게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저는 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마치 우리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공덕을 쌓듯이 여러 가지 선행과 미신적인 요소들(사제의 축복, 고해성사, 천사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등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고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마치 구약의 유대인들이 율법의 표면적인 행위의 준수로 구원에 이른다고 착각한 것처럼 가톨릭에서도 어떠한 행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루터의 회심 간증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게 되었고 그 때 당시의 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성경을 읽으며 제가 그 때 당시 수준에서 파악한 성경 진리에서도 종교다원주의, 천사숭배, 마리아 숭배하는 가톨릭은 확실히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기에 장로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에서 제가 발견했던 것은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경향이었습니다. 장로교에서 경험한 율법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구약 시대에 까다롭고 복잡한 온갖 율법의 규례들을 준수해야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신약시대에는 간편하게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을 폐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우리는 죄인이기때문에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맞출 수 없다, 다만 십자가 은혜를 의지해서 믿을 때 구원받는다, 구원에 있어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기때문에 우리의 의로움도 무의미하다는 식의 견해였습니다.
첫째 견해는 그나마 납득이 되었지만 두 번째 견해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마태복음 7:21과 야고보서의 행함을 강조하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읽게 되었고, 행위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온전한 답을 갖게 되었습니다. 행함을 산출하는 참된 믿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 편, 율법에 대해서는 도덕법은 유지되고, 의식법과 사회법은 폐해졌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5:17~20이후 계속되는 도덕법에 대한 말씀을 보았을 때 이 견해는 문맥상으로 하자가 없어 보였고, 너무나 명확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경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율법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마음속의 걸림이 있었습니다. 항상 성경 해석의 제 1원칙은 성경 본문이 일차적 의미차원에서 명시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으로 보려는 시도가 불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리스도의 율법 자체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리고 이 견해가 성경 전체의 방향성에 비추어보았을 때 정확해보였기 때문에 저의 견해를 고수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의 이번 주 말씀을 통해 이런 모든 걸림들이 사라지고, 명쾌하게 율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사회법의 세 가지로 나누어보는 견해는 다음의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구분하여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폐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의식법 뿐 아니라 도덕법도 불신자와 신자 사이를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생각났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불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의식법이지만, 신자에게는 도덕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있어 의식법, 도덕법, 사회법의 구분과 경계가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또한 율법을 단일한 실체로 인식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가진 율법에 대한 견해는 성경 전체의 통전적 측면에서는 바람직했지만, 성경적으로 치밀하게 따져보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번에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이 구약적인 관점에서는 폐해진것이고 신약적인 관점에서는 온전케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온전케 하셨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성화의 측면에서 말씀하신것입니다. 이것은 아직의 차원에서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기위해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준수하는 성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이 폐해졌다고 하는 것은 구약적인 관점에서 말씀한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의 차원에서 구원을 받는 측면에서 구약 시대의 율법이 그 역할을 다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천국 피트니스 센터라는 헬스클럽에 등록한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카운터에 돈을 내고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데 소음 등을 내어 다른 회원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운동기구를 오랫동안 점유하거나, 하는 등의 헬스 클럽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헬스 클럽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헬스클럽의 규칙을 잘 준수한다고 해봅시다. 운동기구도 내 것처럼 아껴쓰고, 원래 자리에 잘 갖다 놓고 매너도 좋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헬스클럽에 돈을 내고 등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당연히 운동할 자격이 없는것입니다. 먼저 카운터에서 돈을 내고 등록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구원의 문으로 처음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받고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의로움이 구원의 자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난 이후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준수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삶은 성령님과의 협력을 통해 가능합니다. 구원이 우리의 자유 의지를 드려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 또한 자유의지와 성령님의 도우심,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화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공로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공로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이미 차원과 아직 차원에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미 차원의 구원의 조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 공로입니다. 아직 차원의 구원의 조건은 성경 말씀에 대한 복음적인 순종(성령님의 은혜에 힘입은 순종 – 이것은 인간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력구원이 아니다.)입니다. 저는 이것을 진입조건과 유지조건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 산상수훈 서론을 처음부터 다시 듣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생각할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은혜로 이런 말씀을 듣나 하는 감사함이 올라옵니다.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의 설교들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항상 최고의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통로가 되어주시는 담임목사님을 위해 매일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다음글 | 할렐루야! 드디어 담임목사님의 120번째 신간인 "산상수훈(상)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가 출판되었습니다! | Web Team | 2021-01-07 12:56:16 |
---|---|---|---|
이전글 | "담임목사님 저서와 함께 하는 영광의 여정 (20)" (사사모 17팀 문지숙 권사님 & 임승호 장로님 2독 간증) | Web Team | 2021-01-04 18:21: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