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승우 목사가 이단인가 아닌가로 의견이 분분하다. 그는 여러 기성 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 이단 혐의가 없다고 보고했다. 교단들은 이에 대해 반발하고 한기총 실행위원회에서 이대위 전원을 해임하였다. 과연 그는 이단인가 아닌가?
이단의 성경적 근거
이단과 관련하여 성경의 근거는 요한 사도의 가르침이 일차적이다. 요한일서에 의하면 적그리스도, 요한이서에 의하면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요일 2:22),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요일 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요이 1:7)이다.
이를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또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성부·성자·성령 삼위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요한 사도는 형제(분명히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 신자를 말함)의 범죄와 관련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구분한다(요일 5:16). 후자는 구하기를 권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삼위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다른 교리적 차이점을 따르는 모습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해당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내 생각에는 그렇게 말할 근거가 없다. 그것들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해당된다.
삼위일체론 이외에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형제이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가운데서 벗어나도록 구하여야 한다.
다른 복음
이단과 관련하여 다른 부분도 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말하면서 천사라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적었다(갈 1:9).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로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종으로 삼고자 함이다(갈 2:4). 바울 사도는 그들을 갈라디아 교회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갈 5:12).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 준수와 연관되어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에 행위를 덧붙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데,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옳다면 변승우 목사는 이단이 맞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감리교, 성결교 등 많다.
문제는 다른 복음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전혀 아니다. 갈라디아서의 역사적 정황이나 문맥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너무나도 단순화시켜서 생겨난 엉터리 주장일 뿐이다.
사도들의 시대 이해
사도 시대의 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신자로 형성되어 있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전자는 조상으로부터 모세 율법을 받았다. 옛 언약의 백성들이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새 언약의 백성들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옛 언약이 완전히 폐하여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다(행 21:20). 율법은 그들에게 몽학 선생이었다.
후자는 이방인으로서 애초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새 언약의 백성들이 되었다.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고 지킬 이유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몽학 선생도 아니었다.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적이 없고 율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율법 준수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날과 절기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십계명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율법이라고 하면 십계명을 빼고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기에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제사가 포함된다(행 21:26). 바울 사도가 참여하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던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을 대할 때에 아무 거리낌 없이 유대인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그들과 같이 율법 준수를 문제시하지 않았다.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진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무관하게 새 언약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새 언약으로 들어온 이들을 옛 언약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기에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구속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것과 같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그 당대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가하지만 일시적일 뿐이다. 곧 옛 언약이 폐하여지고 더 이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는 그런 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는 책이다. 옛 언약이 완전히 폐해지고 새 언약만이 존재하게 되는 때가 도래할 것이기에 그때에는 옛 언약의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것이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히브리서를 바울 사도가 기록했다고 본다. 다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 사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기에 익명으로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되돌리는 악행에 해당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옛 언약이 폐하여진 이후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옛 언약이 폐하여지는 시점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된 때이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을 통한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가 그것이다. 신약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주님의 강림이 가리키는 바이다.
바울 사도가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한 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옛 언약의 율법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와의 연관성
구원의 문제와 연관시키면 다른 복음이 되고 구원의 문제와 무관하면 다른 복음이 되지 않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믿음에 행위를 더하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인가? 그 또한 전혀 아니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도 그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아주 간단한 유추이다. 아주 쉬운 유추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러한 쉽고 간단한 유추조차 안 되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죽음 이후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이후에 제시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계명 준수 자체가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신자일 뿐이다.
잘못된 일반화와 바른 원리
다른 복음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믿음 이외에 행위를 더하는 것을 일반화시키면 예수님의 말씀과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 율법 준수 요구는 행위인데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위이다. 새 계명을 지키는 것도 행위인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행위이다. 즉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성경이 진술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행위로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행위가 순종이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과 달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전자를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후자도 믿음이라고 기술한다. 같은 단어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순종이다. 의지함인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고 적었다(약 2:24). 여기에서 행함은 순종이고 믿음은 영접함인 믿음이다. 영접함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순종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한다(약 2:26).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였지만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 없으면 영접함인 믿음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약 2:14). 주 예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씀과도 같다(히 5:9).
성령으로 시작하였지만
바울 사도는 성령님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두고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둔다고 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갈 6:7). 그 원리를 부인하는 주장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갈 6:7). 그 대상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들이다(갈 1:6).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갈 3:3). 교회이다.
그 교회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를 다른 복음을 좇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성령으로 시작하였지만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설혹 천사라도 그렇게 가르치면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이들은 베어 버리라고 권면한다(갈 5:12).
그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갈 6:2).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 육체의 일을 하지 않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갈 5:16~24).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결국은 썩어질 것을 거둔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그리스도의 법(율법)을 따르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결국은 영생을 거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 성령으로 시작한 신자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부류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받은 부류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견인이다. 성령으로 시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견인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하다. 인간적인 생각에 좋다고 여겨지는 바를 성경의 가르침인 양 호도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최적의 환경을 갖춘 포도원에 심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최고 수준으로 가꾸신다. 극상품 포도를 맺도록 하기 위한 은혜이다. 그 은혜 안에서 극상품 포도를 맺는 것이 성령을 위하여 심은 삶이다. 그 은혜에도 불구하고 들포도를 맺는 것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은 삶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극상품 포도라는 열매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사 5:1~7). 그 은혜를 바르게 받느냐 아니면 헛되이 받느냐는 신자에게 달려 있다.
부끄러운 교회 현실과 그 원인
교회 역사가 2,000여 년이 지났는데, 구원론 하나도 성경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다. 정말 부끄러운 현실이다. 거기에다가 엉터리 구원론으로 무장한 신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칼뱅의 예정론과 이중 선택 사상을 신학적 기초로 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예정론과 이중 선택 사상은 성경의 진술을 오해한 잘못된 교리이다.
본문에 대한 아주 피상적인 이해의 결과이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 경우에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시제로 구별되면서 그 의미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두 믿음이 어떤 시제의 구원과 연결되는지를 모르기에 나타난 모습이다.
성경의 진술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면서 성경의 진술을 바르게 밝히는 주장을 공격한다. 기성 교단에 속하여 그것을 무기로 내세운다. 여러 차례 적었지만 나도 기성 교단의 구원론이 좋다. 인간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성경의 진술과 다르기에 거부한다. 그로 인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을 당하고 피해를 입고 있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언제까지 그러한 악행으로 핍박을 받고 피해를 입어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까지의 진술이 어려운가? 전혀 아니다. 이해하기에 고난도의 사고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아주 쉽다. 복잡하지도 않다. 영접함인 믿음과 의지함인 믿음, 비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구원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만 구분하면 된다. 전자끼리 짝짓고 후자끼리 짝지으면 된다.
그런데 곧 죽어도 싫단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긴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나타내는 경우를 이단으로 몰기를 서슴지 않는다. 정말로 황당한 일이지 않는가?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가 백성들과 한 족속이 되어 참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당대에 그러한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기존의 입장에서 이야기되는 바이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성경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지옥에 가지 않아야 합니다." 두 주장이 동시에 성립 가능한가? 가능하다. 성경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다. 전자는 과거형 구원으로 비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이고, 후자는 미래형 구원으로 죽음 이후의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설명에 의하면 아니다. 모순이다. 전자가 옳다면 그에게는 후자가 해당 사항이 없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지옥에 가게 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가 옳다면 전자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이 같은 의미라면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친다.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음 카페, 개혁과 진보의 성경적 견인 방에 공지로 올린 글을 참조하면 된다. 성경적 구원론 전체(각 방에 공지로 올린 글들)를 읽으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의 도덕법 문제
기성 교단은 율법의 도덕법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가르친다. 도덕법은 지금도 지켜야 한단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도 막고자 하였는데 완전히 무시다. 구원과 연관시키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한다. 구원과 연관시키면 율법 준수 요구가 잘못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 어이가 없다. 구원은 부가적이다. 율법 준수 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도덕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가? 기성 교단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예수님의 계명에 율법의 도덕법이 완전케 되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에는 완전하게 된 도덕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형제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데, 형제의 생명을 빼앗거나 욕하고 모욕하며 분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지켜야 하는 윤리는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율법 자체가 폐하여졌다. 도덕법도 당연히 폐하여졌다.
도덕법은 지켜야 한다는 기성 교단의 주장이 바울 사도가 정죄한 다른 복음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부분도 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비록 구원과 연관시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안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성 교단의 이단 판정 역사
한국 기성 교단의 이단 판정 역사를 진실하게 되돌아보면 성령님의 역사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일 뿐이다.
자신들도 교리적으로 완전하지 않으면서 완전한 양 착각하고서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성 교단은 교리에 있어서 완전한가? 전혀 아니다. 교단 자체가 교리적 차이로 생겨난 것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무슨 권세로 자신들은 이단이 아니고 다른 쪽은 이단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모습으로 한 말씀을 찾아가야 한다.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 분명해도 교단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니 옳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내가 정통이라는 되도 않은 자부심을 토대로 하여 나타나는 잘못된 모습이다.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단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성도를 보호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식은 아니다.
다락방이나 ***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삼박자 축복으로 신자가 급격히 불어났던 조용기 목사에 대해 이단이라고 했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을 앞세워 세상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힘이 통제할 수 없이 강해지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지금도 똑같은 주장을 하지만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단으로 판정된 모든 경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경우를 옳다고 수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살피고 바르게 판정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그 기준을 바르게 잡는 것이 포함된다. 기준이 성경적이지 않으면 신중하게 살폈지만 잘못된 판정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잘못된 이단 판정은 그렇게 판정된 이들에 속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집단적으로 해하는 악행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