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과 귀신들의 믿음!
야고보서 2:14-26
본문은 표면적으로 바울의 이신칭의의 교리와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24절이 그러합니다.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본문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는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강조한 것처럼 바울 역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룹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야고보의 사상이 서로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왜 표면적으로는 서로 다르게 보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칭의 술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서로 다른 대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키입니다.
1. 바울과 야고보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다르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는 유대인 그룹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행함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가진 교회 안의 신자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19)라는 고백과 같이 믿음을 주로 신앙고백으로 간주하려는 신자들과 씨름하였습니다. 즉 구원파적인 구원론에 반대하여 참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강력하게 강조하였습니다.
2. 바울과 야고보가 다루고 있는 믿음이 서로 다르다.
먼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믿어 순종케 하는 믿음이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즉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용어는 구원파나 구원파에 물든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용어와 그 개념이 다르며,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행함’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바울과 믿음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나 믿음이라는 단어를 다른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그가 여기서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입니다(14). 그 믿음은 행함이 없는 말뿐인 믿음이고(15-16), 순종이 결여된 고백에 불과한 믿음입니다(18-19). 그러므로 둘 사이에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지성을 넘어 의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야고보의 주장은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을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나 참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교회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3. 바울과 야고보가 다루고 있는 행함이 서로 다르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행위’와 ‘행함’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때 회심 이전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함은 믿음에 근거를 두고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 즉 회심 이후의 행위입니다.
이 두 행위의 역할은 각기 다릅니다. 율법의 행위는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순종은 궁극적인 구원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전자는 부정하는 것이 옳고, 야고보처럼 후자는 강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는 전자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후자까지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행위구원과 행위심판은 다릅니다. 행위구원을 주장하면 이단이지만, 행위심판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을 통해 행위구원을 부정하고 있고, 야고보는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라는 말을 통해 행위심판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를 매도하고 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진짜 정통 중의 정통입니다.
4. 바울과 야고보가 다루고 있는 의롭다 함이 서로 다르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구절에 나오는 질문은 부정어 ‘메’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부정적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 않느냐?’라는 뜻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구원하다’라는 말이 회심을 의미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글라스 무는 이것을 후자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바로 앞 절인 13절이 마지막 심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그런 믿음이 심판대에 설 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의롭다 함’이라는 단어를 자주 회심의 성격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강조하고 율법의 행위를 배제하였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의롭다 함’이라는 단어를 궁극적인 구원의 의미로 사용합니다(‘아직의 칭의’). 그래서 행함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진정성은 행함을 통해서만 증명되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한수 교수님은 야고보가 ‘의롭다 함’이라는 단어를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안에 들어가는 수단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수단입니다. 이스라엘은 태어날 때부터 언약 백성 된 신분을 얻게 되지만 그들이 그 신분을 유지하는 것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백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고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의인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겔 18:9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그런데 야고보는 바울과 달리 바로 이런 의롭다 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한수 교수님은 이런 자기주장의 근거로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듭니다.
약 2:21-25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창세기 15:6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삭을 제단에 드린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의 일입니다. 라합도 정탐꾼들을 숨겨주기 전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미래적인 칭의가 아니라 현재적인 칭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본문이 미래적 칭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아브라함이나 라합의 현재적인 칭의를 예로 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통해 현재적인 칭의 가운데 있는 자들(빌 1:11), 즉 주안에 머물러 있는 자만이 심판 날 우리가 ‘아직의 칭의’라고 부르는 궁극적인 칭의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사극을 좋아하고 시골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과거 용인민속촌에 자주 갔습니다. 거기서 장국밥을 즐겨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다보면 칼빈대학교와 루터신학교가 나옵니다